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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수양

‘마음’ 바로 깨치면 그곳이 ‘극락’

by 베짱이 정신 2013. 6. 2.

‘마음’ 바로 깨치면 그곳이 ‘극락’

 
 
모든 것의 창조주인 우리의 마음은 제 몸뚱이도 만들고 제 아버지·어머니, 조부모 등 모든 것을 다 만들어 내는데, 인류의 오천 년 문화도 이 마음에서 나온 하나의 꿈의 소산인 것입니다. 꿈속에서 설탕이 달고 소금이 짠것은 한 개의 활동사진입니다. 그런데 달고 짠 맛이 활동사진에서 생겼다고 해도 말이 안되고 허공에서 그 맛이 나왔다고 해도 안되며, 입에서 저절로 생겼다고 해도 말이 안됩니다.

그러면 달고 짠맛이 어디서 나왔느냐? 꿈속의 입에서 어떻게 단맛이 나올 수 있으며, 꿈속의 입에서 나온 침이 어떻게 달고 짠맛을 낼 수 있겠습니까? 꿈이라는 것은 잠재의식으로부터 나온 하나의 환각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꿈속의 소금이 짠것은 확실히 그것을 먹으면 짤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짠 것이고, 설탕이 달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단 것입니다. 꿈에서 본 장작불은 활동사진의 불과 같은 불이지만, 영화 속에서 보는 불은 안 뜨겁고 꿈속의 불은 뜨겁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활동사진은 필름이 있으니 오히려 미지근이라 해야 할 것이고, 꿈속의 불은 필름도 없으니까 미지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반대의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불이 뜨거울 것이라는 관념 때문에 뜨겁게 느끼는 까닭입니다.

이렇게 꿈과 현실이 똑같은 것은 다 한 마음이 만든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꿈을 꿀 때도 이 몸뚱이, 처자, 재산 다 그대로 놓아두고 마음만 나아가서 꿈 세계를 창조해 놓습니다. 꿈이 깰 때에도 꿈속에 있던 몸뚱이, 처자, 재산을 다 그대로 놓아두고 마음만 생시로 나옵니다. 그래서 우주를 만들고, 몸뚱이, 재산, 처자를 만듭니다.

꿈하고 똑같은 세계를 만듭니다. 거기는 본래 살던 곳이어서 아버지 어머니가 나보다 먼저 있고 내가 공부하던 학교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또다시 꿈속에 들어가서도 생시와 똑같은 굉장한 현실을 똑같이 창조해 냅니다. 이렇게 우리는 낮꿈, 밤꿈을 반복합니다.

옛부터 사람들은 꿈 이야기를 하면 실없는 사람으로 취급되었고, 점잖은 사람은 꿈을 꾸어 놓고도 남에게 이야기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스님들은 꿈이 없다는 말을 합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중노릇을 제대로 하는 수자들은 꿈이 없게 됩니다. 또 대인(大人)들, 수양이 되어 있는 사람들은 확실히 꿈을 적게 꿉니다. 수양이 되면 마음이 비어서 번뇌 망상이 적으므로 꿈이 적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낮꿈은 평생 살아봐도 70년, 80년 밖에 안됩니다. 그것도 잠자는 시간, 병 앓는 시간 다 빼고 나면 몇십 년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밤꿈은 몇백 년, 몇천 년을 삽니다.

따라서 생시는 얼마 안 되는 시간을 산 것이고 밤꿈은 낮꿈의 몇 배, 몇십 배를 더 사는 결과가 되므로, 정말 꿈은 밤꿈이 아니라 생시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그러나 이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 ‘나’입니다.

이 ‘마음’. ‘나’로부터 부처도 나오고 중생도 나옵니다. 지구도, 태양도 나옵니다. ‘나’, 이것 외에는 현실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착각해 육체가 ‘나’라는 망상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고 결국은 육체의 노예가 되고 낮꿈, 밤꿈의 노예가 됩니다. 그래서 탐심(貪心), 진심(瞋心), 치심(癡心) 덩어리의 업을 지어 세세생생 고생을 하는 업에 끌려 다닙니다.

이 ‘마음’을 바로 깨달으면 몸뚱이를 위한 그런 생활이 아니라 중생을 위하고 남을 위한 자비의 생활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때야 비로소 안심이 있고 극락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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