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딜쿠샤
일제강점기이던 1923년 광산사업가이자 AP통신 임시특파원으로 일하던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와 영국인 메리 테일러 부부가 인왕산 성벽을 따라 산책하다 만난 큰 은행나무 아래 붉은 벽돌로 지은 집이다. 본래는 임진왜란의 명장 권율의 집터였던 곳으로,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 앞에 권율 장군 집터라는 표지석이 있다.
집의 이름인 딜쿠샤는 산스크리트어로 '희망의 궁전'이라는 뜻이다. 테일러 부부는 벽난로까지 갖춘 2층 집을 짓고 "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집 짓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며 주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일이다."라는 시편 127편 1절을 새겼다.
1919년 2월 28일, 3.1 운동 하루 전 테일러 부부의 아들 브루스가 세브란스 병원에서 태어났고, 병원 간호사들이 메리 테일러의 침상에 숨긴 기미독립선언서를 앨버트는 동생 빌 테일러의 신발 뒤축에 숨겨 해외에 알리게 했다.
1940년의 어느 날, 아들 브루스는 미군 입대를 위해 딜쿠샤를 떠났고, 1941년 미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태평양 전쟁이 터지면서 앨버트는 적국의 국민으로 바로 수감되었고, 메리는 딜쿠샤에 가택연금되었다. 5개월 남짓 수감생활 후 1942년 일제는 다시 외국인 추방령을 내렸고, 테일러 부부는 급하게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1948년 가을,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던 메리 테일러는 "태평양 너머에 내 나라가 있고, 내 집이 있다"고 늘 말하던 앨버트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자, 죽거든 자기 재를 한국 땅에 묻어 달라고 부탁한 남편의 소원을 들어주려고 성공회 헌트 신부님과 언더우드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 미군함을 타고 한국으로 들어와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앨버트를 묻고 딜쿠샤를 방문했다.
1950년 발발한 6.25 전쟁에도 용케 파괴를 면한 딜쿠샤는 서울이 경제성장의 중심지로 발전하면서 빌딩 숲에 갇힌 신세가 된다. 그 뒤로 딜쿠샤라는 이름은 잊혀지고 동네 사람들에게는 '붉은 벽돌집'이나 '서양 사람 집', '은행나무 집', 심지어 '귀신이 나오는 집' 등으로 불리었으며, 집 없는 사람들이 무단거주하기 시작하여 한때는 16가구가 넘는 가족이 딜쿠샤에 깃들어 생활하기도 했다.
1997년, 유태흥 전 대법원장이 딜쿠샤가 대한제국 시절 신문인 '대한매일신보'의 사옥인 것 같다고 제보하면서 잊혀졌던 이 집이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문화재 지정을 위해 건축가와 역사가들이 딜쿠샤를 조사하던 과정에 "DILKUSHA 1923"이라 새긴 명판이 발견되면서 잊혀졌던 이름을 다시 찾게 되었다.#[1] 서울특별시는 딜쿠샤 자리에 신문박물관을 설립하려 했으나 딜쿠샤가 대한매일신보와 무관한 건물임이 밝혀지자 계획을 취소했다.
2006년, 딜쿠샤를 떠난 지 66년 만에 브루스 테일러가 아내 조이스, 딸 제니퍼와 함께 딜쿠샤를 찾았다. 군대 입대를 위해 그 곳을 떠난 브루스가 87세의 노인이 되어 다시 돌아온 것이었는데, 이것이 그의 생전 마지막 딜쿠샤 방문이었다.
2016년 2월 28일, 브루스가 살아 있었다면 아흔일곱 살이 되는 생일 날, 그의 딸 제니퍼가 2015년에 세상을 떠난 브루스의 재가 든 주머니를 들고 와 딜쿠샤에 뿌렸다. 그 해부터 서울시의 문화재 지정 논의가 본격 진행되어 2017년 8월 국가등록문화재 제687호로 지정되었다. 서울시는 2018년부터 복원 공사에 착수해, 3.1 운동 100주년이던 2019년 딜쿠샤 복원을 마치고 일반 개방을 추진하였으나 건물 내 거주하던 주민들과의 법적 분쟁 탓에 그 해에는 임시 개방에 그쳤다.
출처 : 나무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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