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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비운의 경희궁

by 베짱이 정신 2024. 9. 28.

<사진> 비운의 경희궁

어찌 궁이란게 이 모양인가? 초라하기 그지없도다. 물론 이유가 있겠지? 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영조가 주로 사용했던 궁 경희궁, 철저히 파괴된 궁, 1909년 일제 고위층 자제들을 위해 설립된 경성중학교 건물, 해방 후 서울 중고등학교가 자리잡았던 경희궁.

 

광해군의 명으로 1617년(광해군 9년)에 착공하여 1623년(인조 원년)에 완공했다. 조선 후기 동안 정궁인 창덕궁에 이은 제2의 궁궐로 양대 궁궐 체제의 한 축을 담당했다. 많은 왕이 경희궁에서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거처하면서 창덕궁이 지닌 정궁으로서의 기능을 일정 부분 나눠서 수행했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경복궁의 동쪽 궁궐인 창덕궁 + 창경궁을 지칭하는 '동궐'과 대비시켜 경복궁의 서쪽 궁궐을 뜻하는 '서궐(西闕)'로 불렀다. 규모로 보자면 경복궁 크기의 2/3를 넘는 영역이 경희궁에 속했고, 서울 한양도성 서쪽 성벽 일부와 한양 서북부를 대부분 차지하던 거대한 궁궐이었다.

 

865년(고종 2년) 경복궁 중건을 위한 자재로 사용하기 위해 경희궁 전각의 대부분이 철거되었다. 원래 경희궁에는 전각 100여 동이 있었지만, 주요 전각 5개를 제외하고 모두 헐려 경복궁의 궐내각사와 나인전 건설 자재로 쓰였다.

경복궁 중건 공사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는 《경복궁영건일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서궐(경희궁) 내에는 숭정전회상전, 정심합(正心閤), 사현합(思賢閤), 흥정당(興政堂)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모두 헐었다. 목재를 가져오니 다수가 썩었다. 이 가운데 좋은 것을 골라서 (경복궁의) 나인간(內人間)과 각사의 건조에 사용했다.



경희궁은 한양의 궁궐 중 가장 많이 파괴된 궁궐이다. 흥선대원군 시절에 경복궁 중건을 위한 자재를 확보하기 위해 경희궁 전각의 대부분(90%)이 헐렸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러한 사실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일반에게는 일제에 의해 훼철된 것으로 흔히 인식되고 있기도 하다. 

 

츨처 :나무 위키

궁궐의 대문 이름 가운데는 만드시 "화"자가 들어간다. 이 대문도 역사만큼 오욕의 세월을 겪었네. 이리저리 옮겨 다니고.

철저하게 파괴된 경희궁의 모습을 보노라면, 망국 고려의 신하들이 읊었던 시조가 생각나누나.

이 규모가 궁궐이란 말인가? 그 많던 시설들 다 어디갔어?

임금의 편전(사무실)

서암 - 왕기가 서려 있다던, 그래서 고작 인조라는 썩어 빠진 임금이 나왔던가?

샘물

영조의 영정을 모셨던 태령전

이게 궁궐이란 말이지? 다 헐리고 흔적이 겨우 남은 이곳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