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사육신 묘지와 공원
1. 사육신이란?
(1) 사육신(死六臣)은 ‘죽은 여섯 신하’라는 뜻으로, 조선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사전에 발각되어 처형당한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응부와 고문받기 전 자살한 유성원을 일컫는다. 김문기 포함 여부에 대해서 오랫동안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2) 이들은 집현전 학사로 세종의 신임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단종 복위를 주장하다가 실패하여 처형을 당한 사람들이다.
(3) 사육신 6명은 생육신 중 한 사람인 남효온의 소설 육신전(六臣轉)에서 비롯된 것이다. 애초에 개인이 제작한 도서의 주인공 급으로 선택된 것일 뿐, 당시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처형 당한 이들을 모두 포함하면 70여 명이다. 일가까지 포함하면 수백 명 중에서 주요 인물 6인을 가리키는 것이다.
2. 단종 복위 운동
(1)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이 1453년의 계유정난을 통하여 그의 동생인 안평대군과 황보인, 김종서, 정분 등 3공을 숙청하여 권력을 독차지한 끝에 1455년에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동조자를 규합하여 단종을 다시 왕위에 앉힐 것을 결의하고 그 기회를 살피고 있었다.
(2) 이들은 1456년 6월 본국으로 떠나는 명나라 사신의 환송연에서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과 유응부가 국왕 양쪽으로 칼을 들고 지켜서는 별운검(別雲劍)이란 것을 하게 됨을 기회로 세조 일파를 처치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이 사실이 사전에 누설되어 계획은 좌절되었다.
(3) 소설 육신전에는 한명회가 이를 막았다고 하나, 실제로는 연회장이 좁다며 세조가 친히 운검을 취소시켰고, 성삼문이 이에 "없앨 수 없다"고 반대하나 신숙주가 찬성하여 취소되었다고 한다. 이 때 윤영손이 노하여 신숙주를 죽이려 했으나 성삼문 등이 말리고 거사를 연기하였다.
(4) 이들의 계획이 일단 좌절되자 같은 동지이며 집현전 출신인 김질 등은 뒷일이 두려워 장인 정창손을 통해 세조에게 단종 복위 계획의 전모를 밀고하여 세조는 연루자를 모두 잡아들여 스스로 이들을 문초하였다.
(5) 일단 문초 과정에서의 연루자의 언급 순서는 김질의 입에서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응부가 언급되고, 먼저 끌려온 성삼문에 의해서 박팽년과 유성원, 박쟁이 추가된다(음력 6월 2일).
(6) 여기에 공조참의 이휘가 스스로 관련되었으나 미리 말을 하지 못했다고 자백하러 오면서 박중림과 권자신이 추가된다.
(7) 이후 박팽년을 문초하면서 김문기, 성승, 송석동, 윤영손, 박팽년의 아버지가 추가된다. 그리고 국문 이후 발언을 보면 최득지, 최치지, 박기년, 박득년이 추가되어 있다.
(8) 그리고 며칠 후(음력 6월 7일) 성삼문과 권자신의 입에서 단종의 연루 사실이 나온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망한 인물로 허조가 추가된다. 그리고 이후에도 사육신과 연결되었다는 이유로 머릿수가 늘어나서 결국 70여 명이 된다.
3. 사후 처리 과정
(1) 성삼문·이개·하위지·김문기·박중림·성승·유응부·박쟁·권자신·윤영손·송석동·이휘·석을중·아기지·불덕은 낙형을 당한 후 군기시 앞에서 백관들이 지켜보던 가운데 거열형을 당하였다. 박팽년은 고문 중에 사망했고 유성원은 잡히기 전에 자기 집 사당에서 칼로 목을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후 박팽년과 유성원의 시신 또한 거열형을 당했다.
(2) 거열형을 당한 이들은 3일간 효수되었는데, 어두운 새벽을 틈타 생육신의 한 사람이던 김시습이 이들의 시신을 수습, 한강을 건너 노량진에 이들의 묘를 만들게 된다. 이 묘는 사육신묘의 시초가 된다.
(3) 사육신의 가문들은 모두 개박살나서 친자식은 모조리 교형, 모친과 딸, 처첩, 조손, 형제 자매와 아들의 처첩은 변방의 노비, 이중에서 나이 16세 미만은 외부에 보수라고 하여 보증인이 신분을 보증하는 조건으로 방면하였다가 나이가 되면 위리안치하게 하였다.
(4) 나중에 연결된 이들의 친자로 15세 미만의 경우도 보수하였다가 관노가 된다. 이때 관련된 부녀들의 상당수는 대신들의 노비로 넘어갔고, 그들의 전지의 상당수 역시 대신들에게 넘어간다. 이외에도 이미 결혼한 부녀의 경우는 별로 손을 대지 않아, 이미 시집가 있던 딸들은 화를 면했다.
(5) 예외적으로 사육신은 아니지만 그들과 동조했던 권자신과 현덕왕후의 어머니는 당시 기준으로 (현재 기준으로는 중년이다.)고령에다 남편인 권전도 이미 죽은 미망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현덕왕후의 어머니이자 단종의 외할머니라는 사실 자체가 세조와 공신들에게 눈엣가시여서 그런지 사형을 피하지 못했다.
4. 역사성 논란
(1) 조선은 오늘날처럼 표현의 자유가 있는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 전근대적인 왕조국가인데다, 계유정난은 워낙 갑작스럽게 일어난지라 수양대군 반대파들도 아닌 밤중에 날벼락 격이였다.
(2) 또한 현대에는 사자명예훼손죄라는 법이 존재하고 사육신 관련 문중의 영향력이 아직도 막강하다. 어디까지나 직계 친족들이 화를 당한 것이지 관련 집안들은 아직도 존재한다. 이개만 하더라도 이개 직속 친족들만 죽었지 정작 이개의 일부 친인척들은 세조에게 부역한 공신이라서 잘 나갔다. 물론 이들 후손도 당연히 이개에 대해서 자랑스러운 자신들 집안의 선조로 모시는 중. 박팽년, 하위지는 아예 직계 후손들이 살아남았다.
(3) 이러한 한국 현실에서 이런 역사 수정주의적 입장들이 양지로 나오기는 쉽지 않다. 당장 아래의 사칠신 논쟁에서 엿볼 수 있듯이 조상의 위신을 세우기 위한 문중의 호전성은 우습게 볼 수준이 아니다.
(7) 사육신들이 죽기 전에 썼다는 일종의 절명시들이 구전되는데, 일단 죽기 전에 시나 읊고 있을 만큼 여유로웠던 상황이 아닌만큼 절명시가 아니라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고, 시의 저자가 해당 인물인지도 의심을 받고 있다. 죽음과 연관이 조금 적은 시들로 저자가 시에 조예가 있는 인물이라면 그나마 연결 고리를 찾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후대에 저자 불명인 시들을 해당 인물과 엮은 결과물일 뿐이라는 비판도 받고 있다.
5. 사당의 건립
(1) 사육신의 충성심과 장렬한 의기를 추모하기 위해 숙종 7년(1681)에 이곳에 서원을 세우고, 정조 6년(1782)에는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우는 비)를 세워 두었다.
(2) 1955년에는 사육신비를 세우기도 하였고, 이후 묘역을 확장하여 새롭게 정비하여 충효사상을 기리고자 하였다. 원래의 묘역에는 성삼문·이개·박팽년·김문기 묘만 있었으나, 후에 하위지·유성원의 가묘를 만들어 함께 모시고 있다.
출처 : 나무위키
뷸이문
사당인 의절사
신도비각
헌비
두이에 있는 쪽문을 나가면 사육신의 무덤이 있다
감씨지묘
박씨지묘
유씨지묘
이씨지묘
김문기, 박팽년, 유응부, 이개를 모신 4기의 묘가 모여있다
류씨지묘
성씨지묘
하씨지묘
류성원, 성삼문, 하위지를 모신 3기의 묘가 옆에 모셔져 있다
사육신 공원에서 본 한강철교와 북한산이 멀리 보인다
63빌딩도 보이고
남산의 서울타워도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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