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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해미 읍성

by 베짱이 정신 2023. 4. 3.

<사진> 해미읍성

1417년(태종 17년)에 축성을 시작하여 1414년(태종 14) 충청병마절도사영이 덕산(德山)에서 이곳으로 이설되었다. 1421년(세종 3년)에 축성이 완료되었다. 해미읍성은 원래 왜구의 출몰에 대응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건축되었는데,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이 성에 주둔한 것도 그 때문이다. 세조때에 군사 제도가 진관체제(鎭管體制)로 개편되면서도 이 역할은 여전하여 충청도 지역의 주요 군사거점으로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1651년(효종 2년)에 병마절도사가 청주로 이전하면서 해미현 관아가 옮겨와 해미읍성이 되고, 문무를 겸한 겸영장이 배치되며 호서좌영으로 명칭이 바뀐 이후, 호서 지방 행정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해미읍성이란 명칭도 이때 개명된 것으로 본래 이름은 '해미내상성'(海美內廂城)이었다.

 

조선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1791년(정조 15) 신해박해 때 천주교도라는 모함을 받아 해미읍으로 유배를 왔었으나 정조의 비호로 10일만에 유배가 해제되어 돌아간적이 있다. 1801년대 순조 때 신유박해로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천주교 박해는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 병인양요, 1868년 남연군 분묘 도굴사건 이후 더욱 극심해진다. 조선 후기 충청도 서북 지역(내포지방 13개군현)의 군사와 치안을 함께 관장하던 해미진영(海美鎭營)은 이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하고 처벌하는 임무도 맡고 있었다. 따라서 해당 지역의 천주교도들을 모두 잡아들여 해미읍성에서 처형하였다. 당시 처형된 천주교인들은 무려 1,000여명 이상 이었다고 전한다.

진남문

회화나무

옥사

호서좌영

객사

동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