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인 삶이란 세속을 멀리하고 다른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삶은 하나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삶에 접근하는 방식, 삶을 바라보는 관점,
삶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영적인 사람과 세속적인 사람으로 나뉜다고 생각한다.
이런 차이점이 그대를 의식이 깨어 있는 사람이나 무지한 사람으로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다.
삶은 하나인데 그대는 이 삶을 나누려고 한다.
그대는 영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세속적인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직업을 버리고, 가족을 버리고,
세상에서 짊어져야 할 모든 책임을 벗어던지고 히말라야 동굴 속에 들어가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기는 것이 영적인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인 삶이 아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
이런 삶은 도피에 불과하다. 도망자의 삶인 것이다.
인도와 히말라야에서 보이는 소위 ‘수행자’라는 사람들을 잘 관찰해 보라.
그들 모두가 비겁한 도망자에 불과하다.
그들은 수행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지만
실제로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것은 영적인 삶이 아니다.
영적인 삶이란 소란한 시장바닥에서도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영적인 삶이다.
단순히 소란함으로부터 도망친다고 해서 고요한 침묵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소란함의 한 가운데에서도 고요함을 유지하는 것이 진짜로 영적인 삶이다.
세상 속으로 돌아가라.
다시 세상과 관계를 맺어라.
세상 속에서 그대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라.
그대에게 부과된 책무에는 어떤 의미가 숨어 있다.
그 뒤에 어떤 목적이 숨어 있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어떤 목적이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창조된 목적이 무엇인가?
여기에는 존재계만이 아는 어떤 목적이 있다.
우리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더 큰 목적을 위해
삶의 전체적인 흐름에 순응해야 하는 의무가 부과되어 있다.
이 육체를 잘 보살핌으로써 생존을 도모하는 것이 한 개인의 책무라면,
그 배후에는 삶의 작용에 순응해야만 이룰 수 있는 더 큰 목적이 숨어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영화 각본처럼 진행되고 있는 더 큰 차원의 드라마 속에서
그대에게 부여된 역할이 이것이다.
이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함으로써 그대는 존재계에 공헌한다.
존재계로부터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라.
삶이 그대에게 요구하는 모든 임무를 성실하게 이행하라.
그 역할을 받아들이고 순응하라.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 할지라도 그 뒤에는 어떤 의미가 숨어 있다.
그 배후에는 존재계 자체의 어떤 목적이 숨어 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왜 그대는 지금 이런 상태의 사람인가?
왜 그대는 이런 상황에 놓여있는 것일까?
그대에게 이런 능력과 자질이 주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모든 인간이 독특한 면을 갖고 있다.
모든 인간이 남다른 능력과 자질을 갖고 있다.
이것은 그대에게 주어진 고유의 능력을 통해 존재계가 어떤 목적을 이루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대의 능력을 통해 무엇인가 공헌하라고 이 삶이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삶에서 그대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라.
이것이 그대가 이 삶을 위해 행해야 하는 일이다.
세상에서 도망치지 말라.
이 삶과 더불어 조화롭게 살아가는 법을 배워라.
마찰 없이 이 삶과 친구가 되는 법을 배워라.
그대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하고, 억지로 영적인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마라.
이 삶에서 도망치지 말라.
그것은 영적인 삶이 아니다.
마음은 그렇게 도피적인 삶에 끌릴 것이다.
마음은 모든 책임을 회피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음은 이에 ‘영적인 삶’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부여한다.
하지만 이것은 도피이지 영적인 삶이 아니다.
삶에서 도망치지 말라.
오히려 삶의 한 가운데로 깊이 들어가라.
그대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건 이 삶은 그대로부터 응답을 요구하고 있다.
나는 그대에게 세속적인 삶에서 탈피하라고 하지 않는다.
출가수행자가 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부디 이것을 분명하게 이해하라.
나는 그대를 추종자로 만들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다.
내가 그대에게 바라는 것은, 지금 당장 잠에서 깨어나 그대 자신의 눈으로 실상을 보라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내 말을 듣고 어떤 확신이 든다면 그것을 단순히 지식으로 남겨두지 말고 실제의 삶에 적용하라.
이 삶에서 도망치지 말라.
오히려 삶의 한 가운데로 깊이 점프해 들어가라.
그대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건 이 삶은 그대로부터 응답을 요구하고 있다.
도망치지 말라.
나라와 가족에서 도망가지 말라.
이 삶이 요구하는 어떠한 책임도 모면하려고 하지 말라.
그대에게 부여된 책임을 다하라.
내 말을 듣고 이해한 바를 삶에 직접 적용하라.
만일 내 말이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면 다른 곳에서 해답을 찾아도 좋다.
어쨌거나 수긍이 가는 말을 들었다면 실제로 삶에 적용해야 한다.
만일 오쇼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면 이 삶과 단절하고 수행자가 되어라.
명상을 하고 온갖 정화기법을 행하라.
하지만 이것은 나와는 다른 길이다.
지금 나는 오쇼가 틀렸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내 말을 오해하지 말라.
오쇼에게는 그대를 올바른 지점으로 데려가는 그만의 가르침이 있다.
하지만 그의 길은 머나 먼 여정이다.
나는 그대에게 지름길을 제안한다.
오쇼와 나는 둘 다 그대를 똑같은 지점으로 인도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내가 오쇼를 틀렸다고 말하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라.
다만 길이 다를 뿐이다.
오쇼의 길은 틀림없이 그대를 어떤 지점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그 길은 너무 멀다.
어떤 길을 택하건 그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삶은 그대에게 생각하고 이해할 능력을 주었다.
다른 길에 더 강한 확신이 든다면 그 길을 가는 것이 좋다.
그러니 내가 세속의 삶으로 돌아가라는 말할 때 오쇼를 반대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라.
나는 그럴 의도가 전혀 없다.
오쇼가 알았던 것을 나 또한 분명하게 알고 있다.
나는 그가 사람들을 다룬 방식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오쇼의 방식이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얼마 없다.
시간이 없을 때에는 지름길을 찾아야 한다.
내가 제안하는 지름길은 그대 세속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것이다.
이 지름길의 최종 목적은 삶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찾고 있는 그 무엇의 정체가 이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 삶과 조화를 이루느냐 하는 것이 우리 모두가 찾고 있는 해답이다.
여기 저기 배회하며 영적으로 구걸하고 쇼핑하는 행위에 지쳤을 때,
이때 비로소 그대는 진실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된다.
비로소 자신이 진정으로 찾아 헤매는 것이 무엇인지 자각하게 된다.
그대는 자신의 탐구 자체에 의문을 품기 시작할 것이고,
이런 의문이 진실을 드러내는 이해의 문을 열어 줄 것이다.
이런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면 그대는 여전히 태만한 상태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나태한 사람은 오로지 영적인 구걸에 매달린다.
찾아 헤매는 행위 자체가 그에게는 영적인 오락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태만함은 그가 자신의 절망과 불행에 대해 진지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태한 사람의 탐구는 영적인 유희에 불과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또한 그런 유희에 신물이 나는 때가 온다.
그의 구걸행위가 얼마나 지속되겠는가?
영적인 유희에 빠져 지내는 시간이 천년만년 계속 되겠는가?
언젠가 그는 반드시 지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의 꿈이 계속 변하기 때문이다.
지금 기쁨을 주는 것이 언젠가는 고통의 빌미가 될지도 모른다.
이때 그는 그것을 포기하고 다른 것을 찾아 헤매기 시작한다.
이런 식으로 끝없는 방황이 이어진다.
그러나 지성적인 사람은 이런 식의 방황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탈출구를 모색하기보다는 고통 자체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 고통의 정체는 무엇인가? 왜 이런 고통이 존재하는가?
이렇게 고통 자체를 들여다 볼 때 탐구의 접근방식 전체가 완전히 달라진다.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일단 고통과 불행의 원인을 파악하면 그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자연스럽게 열린다.
그러나 고통의 원인을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 처음부터 무작정 탈출구를 찾는다면 그대는 영원히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런 몰이해를 끝장내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이해를 가져다준다고 믿어지는 어떤 것을 지속적으로 행해 나가야 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그 방법을 행하되 전체적으로 몰입하라.
여기엔 아무 잘못도 없다.
하루 스물 네 시간 내내 명상을 시도해 보라.
그러면 명상의 위력을 알게 될 것이다.
무엇을 하건 전력을 다하라.
어영부영 게으름을 피우지 말라.
그렇게 미지근한 자세로 임하는 사람은 꿈속을 헤매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이 전부이다.
진실로 고통과 불행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마음이 빚어내는 꿈 전체를 이해해야 한다.
그 헛된 꿈이 그대에게 행복을 약속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행위를 하건 전체적으로 몰입하라.
이것이 오쇼가 했던 말이기도 하다.
만일 섹스가 행복을 준다고 믿는다면 전체적으로 섹스에 몰입해 보라.
그러면 섹스가 아주 지겨운 행위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다른 모든 행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것이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믿는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전체적으로 행해 보라.
전체적으로 행하라.
대충 어영부영하지 말라.
어정쩡한 태도로 임하지 말라.
영적인 삶에 그런 자세는 통하지 않는다.
영적인 삶은 그대에게 전적으로 몰입할 것을 요구한다.
꿈이 깨지고 이해의 차원에 도달하면 그대는 모든 것이 게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때 그대는 이 육체가 살아 움직이는 동안 그저 살아간다.
모든 것이 게임일 뿐이다.
더 이상 목적도 없고 욕망도 없다.
이룰 것도 없고, 갈 곳도 없다.
[끼란바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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