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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왜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게 되었을까?

by 베짱이 정신 2022. 6. 13.

우리나라는 왜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게 되었을까? 

 

1. 시대별 결혼 풍습
(1) 한국의 결혼에는 약탈이나 매매와는 다른 과정이 개입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 과거 우리나라의 결혼제도를 보면, 고구려의 서옥제(壻屋制)라는 풍습이 있었는데. 
     혼약이 이루어지면 신부의 집에 서옥(사위 집)이라는 작은 집을 짓고 신혼부부를 살게 한다. 
     부부는 자식을 낳아 장성하면 데리고 떠난다. 
     이 서옥제의 흔적은 '장가든다'는 말로 현재도 남아있다. 
(3) 조선시대에도 신랑이 신부 집으로 와 결혼을 한 뒤 몇 년 살다가 자식이 크면 시댁으로 가곤 했다. 
     대학자 율곡 이이가 태어나서 자란 곳도 신사임당의 친정인 강릉. 
     당시 사람들은 이를 처가살이라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연하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4) '사위집'이라는 뜻을 가진 고구려의 서옥제와

     신랑이 장가가서 자식이 장성할 때까지 장인네 집에서 살았던 조선의 결혼 풍습은 거의 유사하다. 
(5) 조선 중기까지 이러한 풍습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신부가 '시집'으로 가서 겪는 '시집살이'도 비교적 후대(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까지는 낯선 풍경이었다. 

 

2. 여성의 지위
(1) 우리나라에서 지속되어 온 방식의 결혼에는 남자가 여자를 '재산'으로 고려한다는 의미가 들어있지 않다. 
(2) 결혼에는 여성의 부모의 허락이 가장 우선된다. 
      서옥제에 대한 기록을 보면, 사위가 장인장모의 집 대문 앞에 무릎을 꿇고 절하면서 따님과 자게 해달라고 세 번 청한다고 되어 있다. 여성의 집안(가문)이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니 그 집에서 시집온 여성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 
(3) 조선전기(임진왜란 전)만 하더라도 여성들은 상당한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결혼 전의 성(아버지의 성)을 그대로 쓰는 것은 물론, 제사에도 남성과 같이 참여하였고,

     아들과 딸을 가리지 않고 상속을 받았다. 
(4) 고려시대에는 여성들의 사회적 활동도 상당 수준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3. 여성 권익의 변화

(1) 인류학자들은 고대 한국사회가 모계사회였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2) 현대적 의미에서 여성의 권익이 보장되었다고 보기보다는, 여성의 가문이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던 사회라고 본다. 
(3) 이는 조선의 왕들이 외척(왕비의 가문)을 그렇게도 경계했던 사실과도 관계가 있을 것 같다. 
(4) 태종 이방원은 훗날 아들 세종의 장인 심온의 가문을 경계하다 못해 씨를 말려버린다. 

한국 여성의 사회진출 지수가 OECD 28개국 중 28위인 한국의 현실을 들며,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 여권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하지만,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는 것은 분명 여권과 상관이 있었다. 

4. 한국 여성들이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는 이유

(1) 현재 한국 여성의 인권이 바람직한 상황은 아니지만 한국사람들이 역사적으로 여성을 무시해온 사람들은 절대 아니다.
(2) 한국인들이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는 것은 여성(의 가문)을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3) 여성의 가문은 결혼한 여성을 통해 신랑과 신랑의 가문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은 독자적인 성을 갖고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4) 그런 권리들이 현대적 의미의 여권과는 거리가 있겠지만 납치당하고 팔려 다녀야 했던 다른 문화권의 여성들과 비교하면 상당한 수준의 권리라고 할 수 있다. 

 

문화 비교는 어려운 일이다. 
기본적으로 당대를 기준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분명 우리 사회에는 여성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존재한다. 
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악습을 가지고 우리가 5000년 역사 내내 여성을 차별해왔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