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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 카주라호 사원군(1)

by 베짱이 정신 2019. 3. 29.

인도 - 카주라호 사원군(1)

인도-아리안 건축 양식의 걸작으로 꼽히는 카주라호 사원군은 9세기부터 13세기 사이에 번성한 찬델라 왕조에 의해 건설되었다. 찬델라 왕조는 전성기인 950~1050년 사이에 수도인 카주라호에 무려 85개의 사원을 세웠지만 상당수가 이후 이슬람 세력에 의해 파괴되었다. 현재 카주라호에 남아 있는 22개의 힌두교와 자이나교 사원들은 마을의 서부, 동부 그리고 남부에 흩어져 있다.

카주라호 사원군이 유명해진 것은 외벽을 따라 빼곡하게 자리한 조각들이다. 특히 ‘미투나’라 불리는 에로틱한 조각들은 각기 다른 체위의 노골적인 성교 장면을 표현하고 있어 보는 이를 놀라게 한다. 뿐만 아니라 층층이 띠처럼 조각된 신과 여신, 병사, 음악가, 동물 등의 조각들이 천 년 전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서부 사원군 입구의 아침 모습














락쉬마나 사원(Lakshmana Temple)

비쉬누 신에게 헌정된 사원으로 954년경에 만들어졌다. 서부 사원군 중에서 가장 보존 상태가 좋다. 기단 부분이 미투나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 중말과 성행위를 하는 남자는 전쟁터에서의 모습을 재연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이 사원의 맞은편에는 비쉬누 신의 멧돼지 화신에게 헌정된 바라하(Varaha) 신전이 있다.










마땅게스와라(Matangesvara)

카주라호에서 유일하게 지금까지 사용되는 사원이다. 위치상으로는 서부사원군에 속하지만 울타리 밖에 있다. 사원 안에는 2.5m의 시바 신의 남근상이 있다.





파르바티 사원(Parvati Temple) - 흰색 사원 건물 

원래 비쉬누 신에게 봉헌된 사원이었는데, 지금은 아구아나(Godha) 등에 올라간 가우리(Gauri) 상이 있는 곳이다.
































칸다리아 마하뎁(Kandariya Mahadev Temple)

1025년부터 1050년 사이에 지어진 칸다리아 마하뎁은 가장 큰 규모의 사원으로 찬델라 건축 예술의 최고봉으로 불린다. 31m의 높이의 거대한 사원에는 872개의 조각상이 새겨져 있으며, 돌을 깎아서 만든 아르다 만다파(Ardha Mandapa)와 내부 천장은 믿기 힘들 정도로 정교하다.

외벽을 뒤덮은 미투나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분분하지만 가장 유력한 설은 푸르사르타(Pursartha)와 관련되었다는 설이다. 힌두교인의 네 가지 삶의 목적을 의미하는 푸르사르타에는 법과 윤리를 뜻하는 ‘다르마(Darma)’, 물질적 번영을 뜻하는 ‘아르타(Artha)’, 영적인 자유와 자기 실현을 의미하는 ‘목샤(Moksha)’ 그리고 성과 욕망을 의미하는 ‘카마(Kama)’가 포함되어 있다.

인도에서는 소년기에는 아르타를, 청년기에는 카마를, 노년기에는 목샤를 익히라는 가르침이 있는데, 카주라호의 수많은 미투나는 카마수트라의 모습을 조각한 것으로 젊은 수행자들의 성교육 용도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이유야 어찌됐든 로맨틱한 영화의 한 장면부터 성인물에나 나올 법한 다양한 체위의 남녀를 묘사한 수많은 미투나는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자이나교는 마하비라(Mahavira)라고 불리는 한 위대한 인물의 깨달음에서 비롯된 종교이다.

자이나교는 생명 있는 존재를 해치지 말 것, 거짓말을 하지 말 것,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지 말 것, 사유재산을 소유하지 말 것, 금욕을 지킬 것 등 다섯 가지 기본적인 계율을 가르쳤다. 이 가운데 처음 네 가지는 마하비라 이전에 있었던 다른 스승들이 이미 가르쳤던 계율이며 오직 다섯 번째만이 그가 추가한 것이다. 또한 이 다섯 가지 계율은 불교의 오계와도 유사하다.

자이나교에서는 이 다섯 가지 계율 중에서도 생명 있는 존재를 해치지 말라는 불살생 또는 불상해의 계율을 가장 강조했다. 그렇기 때문에 후대의 자이나교도들은 땅속의 벌레들을 해칠까봐 농사를 짓지 않고 오직 상업에만 종사하고 철저하게 채식 위주로 생활했다. 후에 자이나교는 오직 흰색 옷만 입는 백의파(Shvetambara)와 어떠한 옷도 걸치지 않는 나의행파(Digambara)로 나뉜다.

자이나교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그를 자아(Jiva)보다 낮은 위치에 두었다. 또한 계급 제도에 대한 비판도 불교만큼 강하지 않았다. 마하비라에 의하면 사람들이 높거나 낮은 가문에서 태어나는 이유는 그가 전생에 지은 행위의 결과(카르마)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가장 낮은 계급의 찬달라에게 인간적인 가치가 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절대로 아니다. 자신이 전생에 쌓은 업에 의하여 현생의 삶이 결정되기 때문에 누구든 전생에 쌓은 카르마를 보다 빨리 해소하고 현생에서 더 이상 카르마를 쌓지 않는다면 모두 다 해탈이 가능하다고 마하비라는 주장했다. 그는 또한 제사 의식이나 희생제와 같은 행위는 절대로 해탈에 도움을 줄 수 없으며 오직 올바른 지식과 올바른 행위 그리고 올바른 믿음만이 진정한 깨달음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자이나교는 희생제와 같은 제식을 거부하고 특히 불살생 또는 불상해의 계율을 강조함으로써 전쟁과 농사를 부정했다. 그 결과 상업에 종사하는 바이샤 계급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신을 인정하고 신분의 차이를 어느 정도 인정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브라흐마니즘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자이나교는 비록 인도의 여러 지방으로 전파되면서 왕들의 지원을 받기도 하였지만 후대로 갈수록 전래의 브라흐마니즘 속에 흡수되고 말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자이나교는 오늘날의 인도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자이나교와 유사하면서도 브라흐마니즘에 더욱 철저하게 반대했던 불교는 훨씬 빠른 속도로 인도를 비롯한 전 세계로 퍼져나가기는 했지만 그 발생지인 인도에서는 소멸되는 아이러니컬한 결과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