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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수양

마음 찾는법

by 베짱이 정신 2014. 10. 13.

마음 찾는법


인간의 실체는 육신과 마음이라는 이중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은 숨 한번 들이 쉬었다 내뱉지 못하면
그 자리가 저승이요 죽음입니다.
육신을 꽁꽁 묶어 관속에 집어넣고 다비장(茶毘葬)에서 훨훨 태워버리면
한줌의 재가 되어 사라집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진짜 나일까요.
육신을 끌고 다니는 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마음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고, 어느 곳에 있을까요.

애석하게도 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모양이 없을 뿐더러
'있다, 없다'는 개념을 초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마음을 어떻게 찾아서 깨치는 것이 가능할까요.
옛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을 갖고 찾아서 깨치려한다면
영원히 찾아 깨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여기 컵 안에 들어있는 물이 모든 물건을 적셔주지만
물은 물을 씻을 수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결국 마음을 가지고는 마음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교는 왜 마음을 찾는 종교라고 하는지 의문이 들 것입니다.
마음 찾기에는 여타 학문분야의 연구방법과는 차별을 갖는
불교만의 전혀 새로운 형태의 공부법이 있습니다.

보이지도 않고 있지도 않은 마음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물음에 확고한 해답을 얻으셨던 분입니다.
이후 시대가 흐르면서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그의 제자, 출가자, 재가자 할 것 없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러한 마음을 찾아 구경(究竟)에 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습니다.

마음을 찾는 수행법은 다양하고 끝이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중국불교 수백 세대를 거치며 완성된 간화선이 으뜸입니다.
당대 중국의 유명 조사스님들은 자신의 이러한 간화선 체험을
'조사어록'이라는 기록물로 밝혀두었습니다.
그중 한분이 조주스님이십니다.

어느 날 조주스님에게 한 스님이 와서 물었습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그러자 스님은 "없다(無)"고 답했습니다.
그때 다른 스님이 와서 또 "개에게도 불성이 있냐"고 묻자
스님은 앞서와 달리 "있다(有)"고 답했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스님이 또 묻기를
"그러면 스님은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조주스님은 "나는 없다(無)"고 답했습니다.
질문을 한 스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일체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왜 화상(和尙)은 무슨 연유로 없다고 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또 "화상이 중생이 아니라면 부처님이십니까"라고도 거듭 물었답니다.
조주스님은 불성이 생각이나 말로 미칠 수 있는 곳이 아니며
우리가 추구하는 구경(究竟)은
말, 생각,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설한 것입니다.

이렇듯 불가사의한 마음의 근본을 잡는 방법에 대해
조주스님 등 옛 조사들은 간화선 같은 직관의 수행방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화두(話頭)를 들고 화두에 의해서 그것을 찾아낸다는 것입니다.
간화선은 옛 조사스님들이 뼈를 깎는 각고의 체험을 통해서 정리된 것으로
단지 관념론이나
또는 어느 특정인의 독단적인 수행관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닙니다.
수천 년 동안 검증된 보편적이면서 타당한 수행법입니다.

간화선에서 화두는 의심덩어리입니다.
올바른 화두법은 하늘을 봐도 하늘이 보이지 않고
머리를 숙여도 땅이 보이지 않으며 산을 봐도 산이 아니며
물을 봐도 물이 아닌 것입니다.
오직 화두 하나에 온 의심을 다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사실 제가 마음 찾아가기를 이야기 하고는 있지만
이를 표현하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여기 오미자차가 있지만 차 맛이 어떠냐고 물어보시면
'시큼하다' '시원하다' 등의 말로는 표현할 수는 있지만
진정으로 오미자차의 맛을 100%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하는 말로 오미자차의 모든 맛을 알았다면 그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선(禪)은 실천궁행(實踐躬行)이지 이론과 머리로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8만4천여 경전과 수많은 어록, 역대 선지식들의 법문이
오미자차의 정확한 맛을 표현하기 위해 비유와 직설을 하지만
그것이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차를 마시지 않고서는 진정한 차 맛을 알 수 없는 것처럼
천년만년 경을 독송하고
스님의 법문을 들어도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은 남의 것일 뿐입니다.

선(禪)에서는 알음알이가 오히려 마음을 찾는 큰 장애물이 됩니다.
또 의심덩어리인 화두도 종내에는 망상이 되기도 합니다.
강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탔다면 강을 건너고 나서는 배를 버려야 합니다.
강을 건너고도 배를 짊어지고 다닌다면 소기의 성과를 이룰 수 없습니다.
화두도 망상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화두마저 사라지면 아무것도 섞이거나 잡된 것이 없이 허공처럼 맑아서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유지됩니다. 그것이 무심(無心)한 경지입니다.
그렇다고 무심한 경지가 우리가 최종 바라는 구경은 아닙니다.
물이 흐르지 않고
오래 머물러 있으면 썩는 것처럼 무심한 경지에만 빠져있다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도 모자라 귀신굴로 빠져들게 됩니다.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라 했습니다.
내가 생사를 걸고 마음을 깨쳐야 되겠다는 확고한 마음이 생긴다면
백척간두에서도 진일보 할 수 있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마음을 깨쳐 확철대오(確哲大悟)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실천궁행(實踐躬行)은 마음을 찾기 위한 필수요소입니다.
부처님께서 45년간의 포교활동을 접고 열반에 드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는 것이니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힘쓸지니라"

여건이 좋고 행운을 만났는데도 공부를 못하는 것은 게으른 것입니다.
이번 기회에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고
부처님과 옛 조사들의 말씀 등을 되새기며 실천하십시오.
인류역사상 가장 강한 실천력으로 '당당하고 신나며 멋있게' 사셨던 분은
석가모니 부처님 이셨습니다.
모두들 그렇게 '당당하고 신나고 멋있게' 살아가십시다.


<법주사 회주 혜정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