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추석날의 창덕궁
돈화문 - '돈화(敦化)' 뜻은 '(백성을) 도탑게(화목하게) 하고 교화시킨다'이다. 유교경전 사서 중 하나인 《중용》에서 따온 말이다. 궁궐의 큰 문 이름에는 가운데에 "화"자가 들어간다.
금천교 - 금천교는 이름대로 금천을 건너기 위해 세운 돌다리이다. 금천은 풍수지리적인 이유와 외부와의 경계를 나타내기 위해 궁궐의 정문과 중문 사이에 둔 인공 개천이다. 금천교 밑을 흐르던 창덕궁의 금천은 북악산에서 발원한 '북영천(北營川)'이다. 다리 윗 부분 동, 서 가장자리엔 각각 6개의 돌 기둥을 설치한 뒤 그 사이마다 난간을 설치했다. 돌 기둥 중 엄지기둥의 머리 부분엔 서수를, 조각하여 올렸고 나머지 기둥엔 연꽃봉오리를 장식했다. 그리고 기둥 사이마다 판석을 세웠는데, 판석은 하엽동자기둥 모양의 부조를 중심으로 구멍을 2개 뚫어놓았고, 칸마다 4잎 형 안상을 투각하여 놓았다. 금천교를 넘으면 다른 세계 - 임금과 백성이 사는 세계는 다름.
궐내각사 건물 중 옥당 - 홍문관의 별칭으로 궁중의 문서 처리와 관리 및 임금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하던 기관이다. '옥같이 귀한 인재들이 일하는 집'이다. 1463년(세조 9년)에 세조가 집현전을 대신할 문서 보관 기관으로 처음 만들었고, 성종이 자문 및 학술 연구 기관으로 재편했다. 그때 홍문관 청사도 지은 듯 하다. 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으로 불탄 후, 광해군 때 재건했다. 1907년(융희 원년)에 일제는 홍문관 기구를 폐지했고 일제강점기에는 건물마저 헐었다. 문화재청에서 2000년 ~ 2004년에 복원했고 2005년에 일반에 개방하여 오늘에 이른다.
선원전 - 선원전은 역대왕들의어진을 모시고제사지내던 진전(眞殿)이다. 쉽게 말해 종묘가 궁궐밖에 있는,국가차원의 공식적인 사당이라면, 선원전은 궁궐 안에 있는 왕실의 사당이다. 원래 선원전은 경복궁에 있었는데 1592년(선조25년)임진왜란때 불타 없어졌다. 이후 1695년(숙종21년)에어진제도를 새로 정비 및 재정립을 하면서창덕궁에 선원전을 두어 100여 년 만에 부활하였다. 이 때 건물을 새로 짓지 않고 1656년(효종 7년)경덕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겨 짓고 이름을 바꿔 사용하던 별당 춘휘전(경덕궁에 있을 당시 이름은 경화당) 건물을 선원전으로 고쳐 활용하였다.
숲 속에 공개되지 않은 건물도 있고
몇 백년 묵은 은행나무와 책고 - 책을 보관하던 창고
검서청 - 규장각 검서관들의 사무실, 당직실이었다. 검서관은 규장각에서 사관을 도와 책을 교정하거나 책 원본을 똑같이 베끼는 일을 하던 관리였다.
검서청 - 정조는 즉위 직후인 1777년(정조 1년)에 창덕궁 후원에다 주합루를 짓고 그곳에 규장각을 두었다. 그러나 규장각의 규모가 커져서 주합루에 많은 책과 문서를 보관하기 힘들자, 1781년(정조 5년)에 옛 오위도총부 자리에 규장각 청사를 새로 지어 이전시켰다.
규장각 - 조선의 왕실 도서관 및 학술연구기관이다. 정조가 처음 세운 규장각 청사는 창덕궁 주합루였다. 규장각의 규모가 커지자 정조는 인정전 서편 궐내각사 구역으로 규장각을 이전시켰다.
인정전 - 창덕궁의 정전이다.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곳이다. 맹자가 왕도정치를 강조하면서 언급했던 '인정(仁政)'에서 따왔다. 이름 그대로 어진(仁) 정치(政)를 바탕으로 훌륭한 정치를 실현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조선 후기 내내 사실상 정궁 정전(법궁 법전)으로 궁궐을 상징했다.
근정전 회랑
선정전 - 창덕궁의 편전이다. 편전은 평상시 임금이 신하들과 함께 나랏일을 보고 경연을 하던 곳이다. 이름의 뜻은 "정치(政)와 교육을 널리 펼친다(宣)"이다. 선정을 베풀라는 뜻으로 착각할 수 있지만, 그 ‘선정’은 ‘善政’이다. 창덕궁의 유일한 청기와 건물.
조선 후기에 내전의 희정당을 편전으로 사용하면서, 왕실에서는 선정전을 혼전 / 빈전으로 주로 사용했다.
선정전의 역사 - 1405년(태종 5년) 창덕궁 창건 때 지었다. 처음엔 조계청(朝啓廳)으로 부르다가 1461년(세조 7년) 12월에 이름을 선정전으로 고쳤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8년(광해군 원년)에 복구했으나, 인조반정 때 다시 화재를 입어 1647년(인조 25년)에 재건한 후 오늘에 이른다.
희정당 - '희정(熙政)'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정치(政)를 빛낸다(熙)’는 뜻이다. 인조 시기 지제교[4] 채유후는 희정당 상량문에 ‘희(凞)’는 ‘밝고 넓다’는 의미를 본 딴 것이라 하면서, “정사를 밝혀 백성을 접하니 백성이 충정을 다하고, 정사를 넓혀 백성을 구제하니 혜택을 입지 않은 백성이 없다는 뜻으로 ‘희정(凞政)’이라 이름했다.”라고 뜻을 풀이했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서는 희정당을 ‘협양문내선정전동(協陽門內宣政殿東) 연침접군신지소(燕寢接君臣之所)’, 즉 협양문 안 선정전 동쪽에 있는 임금과 신하가 만나는 연침으로 소개했기 때문이다. 연침은 임금이 일상생활을 하던 공간으로 주로 침전을 일컫는 말이다.이러한 일련의 자료들을 종합했을 때, 희정당은 '일상생활도 영위했던 편전'으로 보는 편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희정당의 역사 - 1405년(태종 5년) 창덕궁 창건 때 지은 것으로 보인다. 처음엔 '수문당(修文堂)', '숭문당(崇文堂)'으로 부르다가 1496년(연산군 2년) 12월에 희정당(凞政堂)으로 고쳤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8년(광해군 원년)에 복구했으나, 인조반정 때 다시 화재를 입어 1647년(인조 25년)에 인경궁 화정당을 옮겨 재건했다. 순조 때 다시 소실된 것을 1835년(헌종 1년)에 재건했으나 일제강점기였던 1917년 11월에 또 다시 불타 사라졌다. 1920년에 복구했는데 경복궁 강녕전을 옮겨 지었다. 그 때문에 조선시대 본래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보춘정 - 창덕궁 내 성정각(誠正閣)에 딸려 있는 누각이다. 창덕궁 성정각 건물 동쪽에는 누각 건물이 붙어 있는데, 동쪽에는 희우루(喜雨樓), 남쪽에는 보춘정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희우(喜雨)’는 가뭄 끝에 단비가 내려 기뻐한다는 의미이고, ‘보춘(報春)’은 봄이 오는 것을 알린다는 의미이다. 「동궐도(東闕圖)」에도 똑같은 모습으로 편액이 걸려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래층이 누의 형태로 빈 공간인데 반하여 「동궐도」에는 막혀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희우루 - 희우루 이름은 정조가 지었다. 이와 유사한 정자 이름으로 한강의 희우정, 주합루 뒤쪽의 희우정이 있다. 모두가 단비가 내린 연후에 그 기쁨을 정자의 이름에 반영한 것이다. 성정각의 희우루도 같은 맥락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낙선재 - 창덕궁의 주거 건물이다. 전반적으로 양반가 형식을 따랐으나 궁궐 침전 양식을 가미한 집이다. 낙선재라 하면, 낙선재 건물 한 채만을 가리킬 때도 있지만 보통은 낙선재와 다른 부속 건물들을 통틀어 부른다. 좁게는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 만을 말하며 넓게는 건물들 뒷편의 화계와, 그 위 너머로 있는 상량정 · 한정당 · 취운정까지 통틀어 낙선재 권역이라고 한다. 대한제국의 황실 가족들이 1989년까지 살았던 곳으로 가장 최근까지 사람이 살았던, 궁궐 전각들 중 그나마 사람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기하학적 무늬
담장의 무늬
석복헌 - 낙선재 본채보다는 1년 늦은 1848년(헌종 14년)에 지었으며 헌종의 후궁 경빈 김씨가 머물렀다. 그러나 불과 1년 뒤인 1849년(헌종 15년)에 헌종이 죽자 후궁인 경빈 김씨는 궁에서 나왔고 석복헌은 비었다.일제강점기 이후 1912년에 고종의 친형인 흥친왕이 죽자, 순종이 석복헌 동쪽 뜰에서 망곡했다. 1917년 대조전이 화재로 불타자 순종과 순정효황후가 잠시 석복헌을 침전으로 사용했다. 1966년 2월 3일 순정효황후가 이 곳에서 붕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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