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추석날의 창경궁
통명전 - 창경궁은 대비 등 왕실 가족들의 거주 공간 확보를 목적으로 지어서, 왕실 구성원들은 다른 궁궐에 있을 때와 다르게 비교적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건물을 사용했다. 그래서 창경궁 내전 건물의 경우, 전각의 주인을 뚜렷하게 구분하기 모호하며 통명전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만 여러 기록을 볼 때, 주로 왕비와 대비 등 왕실 내 최고위급 여성들의 공간으로 많이 사용한 듯 하다.
1484년(성종 15년) 창경궁 창건 때 처음 지었고,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6년(광해군 8년)에 중건했다. 그러나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으로 다시 소실되었고 1633년(인조 11년)에 복구했는데 이 때 인경궁의 청와전(靑瓦殿)을 옮겨지었다. 1790년(정조 14년)에 다시 화재를 입어 1834년(순조 34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통명전 - 이름은 창건 당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이던 서거정(徐居正)이 지었다. ‘통달(通)하여 밝다(明)’는 뜻으로, '크게 밝은(明) 전각에 앉아서 백성들의 삶을 통달(通)하여 국가를 잘 다스리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조선 인조 대의 문신 정백창(鄭百昌, 1588 ~ 1635)은 《통명전 상량문》에서 ‘크게 밝은 집(大明宮)’으로 풀이했고 ‘옥황상제의 궁전’이란 뜻도 있기 때문에 숙종은 《통명전(通明殿)》 시에서 신선의 집으로 풀이했다.
양화당 - 1484년(성종 15년) 창경궁 창건 때 처음 지었다. 1565년(명종 20년) 때는 명종이 양화당 뒷뜰로 유생들을 불러 시와 글을 짓는 일종의 논술 시험인 제술(製述)을 보게 하고, 현장에 있던 신하들에게 술을 내렸다. 병자호란 이후 남한산성에서 돌아온 인조는 주로 이 곳에서 머물렀다. 현판의 글씨는 순조가 직접 썼다.
경춘전 - 창경궁의 침전이다. 이름은 성종 시기 창건할 때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이던 서거정이 지었다. ‘경춘’은 글자 그대로 풀면 ‘햇볕(景) 따뜻한 봄(春)’이라는 뜻이다. 순조는 후술할 《경춘전기》에서 ''경(景)'은 큰 것을, '춘(春)'은 장수함을 뜻하니 옛날과 지금에 걸쳐 축복하는 말'이라고 표현하였다. 현판 글씨는 순조가 직접 썼다
함인정 - 함인정은 원래 인양전仁陽殿이 있던터에 1633년(인조11)건립된 정자이다. 남향에다 앞마당이 넓게 트여있어 왕이 신하들을 만나고 경연을 하는 곳으로 이용하였다. 1830년에 소실되었다가 1833년에 재건되었다.함인정은 건물사방이 벽체없이 시원하게 개방된 모습인데, <동궐도>에는 지금과 달리 3면이 막혀있다.
환경전(우) - 왕과 왕세자 등 주로 왕실 내 최고위급 남성들이 많이 머문 곳인 듯 하다. 이름은 창건 당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이던 서거정(徐居正)이 지었다. ‘환경(歡慶)’은 《시경》 - 〈소아 · 초자〉 편에서 유래한 말로, ‘기뻐하고(歡) 경하(慶)한다’는 뜻이다. 1484년(성종 15년) 창경궁 창건 때 처음 지었다. 1544년(중종 39년) 11월에 중종이 여기서 승하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불탔고 1616년(광해군 8년에 중건되었다. 그러나 이괄의 난 때 다시 소실되어 1634년(인조 12년)에 같은 창경궁내에 있던 문명전을 옮겨 재건했다. 1645년(인조 23년)에는 소현세자가 여기서 사망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데리고 환경전에서 경서를 강론하고 정사를 펼쳤으며 신하들을 접견하기도 했다. 이후 사도세자의 장남이자 정조의 친형인 의소세손이 여기서 잠시 기거했다.
1830년(순조 30년) 8월 화재로 불탔고 1833년(순조 33년)에 복구했다. 일제강점기에 창경궁이 창경원이 되면서 많은 창경궁의 전각들이 사라졌지만 환경전은 살아남았다. 다만, 일제가 환경전을 이왕직박물관 전시실로 바꾸면서 외부와 내부를 많이 훼손했다.
환경전은 본래 침전이나 왕실의 상, 장례 공간으로도 많이 쓰였다. 1575년(선조 8년) 명종의 왕비 의성대비(인순왕후)의 상 때 여막을 이곳에 둔 것이 그 시작이다. 조선 후기의 왕실의 상, 장례를 대표하는 공간이 되었다.
숭문당 - 창경궁의 편전이다. 편전은 평상시 임금이 신하들과 함께 나랏일을 보고 경연을 하던 곳이다. 공식적인 편전은 문정전이나 일상적으로는 숭문당을 더 많이 활용했다. 기능적으로 창덕궁 희정당, 경희궁 흥정당과 유사하다. '숭문(崇文)' 뜻은 '학문(文)을 숭상(崇)한다'이다. 참고로 창덕궁 희정당의 원래 이름 역시 숭문당이었다. 현판 글씨는 영조가 직접 썼다.
숭문당 - 성종 시기 창경궁 창건 때는 없었고, 임진왜란 이후 1616년(광해군 8년)에 창경궁을 복구할 때 처음 지었다. 이후 창덕궁 희정당처럼 왕이 좀 더 편한 분위기에서 국정을 돌보고 경연을 하는 공간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창경궁 자체가 공식적인 국사보다는 왕실 구성원들의 거주, 행사에 초점을 둔 궁이라 숭문당을 자주 활용하진 않았다. 조선 후기 들어 공식 편전 문정전을 혼전으로 활용할 때, 숭문당을 곡하는 곳으로 많이 사용했다
명정전 - 창경궁의 정전.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 의식을 거행하는 곳이다. 창경궁의 정문 홍화문으로 입궐했을 때 옥천교를 건너 명정문을 통해 바로 정면에 보인다.
명정전 - 다른 궁궐의 정전과는 다르게 남향이 아닌 동향으로, 이는 풍수지리 및 지형 문제에 근거해 배치한 것이다. 이 때문에 성종은 '임금은 남쪽을 바라보고 정치를 하는데 명정전은 동쪽이니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정전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그런지 명정전에서 열린 행사는 크게 중요한 국가행사보다는 규모가 비교적 작은 행사나 왕실의 잔치 등이었다. 명정전에서 즉위식을 거행한 왕은 인종이 유일하다.
문정전 - 창경궁의 편전이다. 편전은 평상시 임금이 신하들과 함께 나랏일을 보고 경연을 하던 곳이다. 이름은 창건 당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이던 서거정(徐居正)이 지었다. 1483년(성종 14년) 창경궁 창건 때 지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6년(광해군 8년)에 복구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창경궁을 놀이공원 창경원으로 만든 후, 1930년대에 헐었다. 1983년에 창경원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긴 후 1984년에 발굴 조사를 했고 1986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1530년(중종 25년) 성종의 계비이자 중종의 어머니인 정현왕후 윤씨의 혼전이 설치된 것을 시작으로, 조선 후기에 들어 본격적으로 혼전/빈전[3]의 기능을 주로 맡아 사실상 편전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했다. 문정전의 인식이 혼전으로 굳어지면서 문정전의 정문인 문정문 밖에 있던 도총부와 승정원·홍문관등의 여러 관청이 이전되었다. 임금의 업무를 돕기 위해 편전 근처에 있던 관청들인데 이 일대가 혼전의 부속 시설로 활용되면서 다른 곳으로 옮겨간 것.
창경궁 팔각칠층석탑(昌慶宮 八角七層石塔) - 기존의 석탑과는 양식을 달리하는 석탑으로서 지대석과 기단부가 매우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는 탑이다. 이 탑은 일제 강점 초기 1911년에 창경궁에 이왕가박물관을 건립할 때 만주에서 가지고 온 상인으로부터 구입하여 세운 것이라고 한다. 현재 창경궁 내 식물원 앞 연못(춘당지)가에 위치하고 있다. 1992년 1월 15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119호로 지정되었다.
춘당지 - 창경궁의 연못이다. 연못이 두 개로, 북쪽의 작은 연못(소춘당지)과 남쪽의 큰 연못(대춘당지)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한 권역으로 묶어 사용했다. 특히 후원 권역은 더욱 그랬다. 지금은 춘당대 한 가운데를 담으로 막아 인식하기 어렵지만, 춘당대의 위치는 현재의 춘당지 바로 옆이다. 그래서 연못의 이름을 거기서 따온 것이다.
대온실 - 창경궁에 있는 식물원이다. 춘당지의 북쪽, 관덕정의 서쪽에 있다. 대한제국 순종 시기인 1908년(융희 2년)에 짓기 시작했고, 이듬해인 1909년(융희 3년) 11월 1일에 개관했다. 당시 대한제국은 실권을 일제에게 모두 빼앗긴 상태였고, 일제는 대한제국의 모든 내정에 간섭하고 있었다. 1907년(융희 원년)에 순종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 후, 일제는 근심이 많은 순종의 마음을 달랜다는 명목으로 창덕궁 옆에 있는 창경궁을 유원지로 개조하여 동물원과 식물원을 세우고 이름도 '창경원(昌慶苑)'으로 바꾸었다. 그때 식물원의 대온실로 만든 것이 이 건물이다. 설계는 일본 신주쿠 교엔 담당자였던 일본인 원예학자 후쿠바 하야토(福羽逸人)가 맡았다. 시공은 프랑스 회사에서 맡았지만 어느 회사인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창경원 대온실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온실로, 당시 동양 최대의 규모였다. 대온실에는 당시로서도 쉽게 보기 힘든 열대 식물을 비롯한 다양한 화초들을 전시해두었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이왕직식물원(李王職植物園)'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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