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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베짱이의 인도 네팔 유람기 2편 - 델리관광, 자이푸르 가는 날

by 베짱이 정신 2019. 3. 22.

베짱이의 인도 네팔 유람기 2편

둘째 날(2019. 3. 9. ) - 델리관광, 자이푸르 가는 날

 

몹시 피곤하여 잠을 잤는데도 현지시각 새벽 230분에 눈이 떠지네. 한국과 시차는 3시간 30분인데도 말이다. 생체리듬이 한국에 맞춰져 있어서 그럴까? 피로를 풀기 위해서는 잠이 좀 더 필요한데 그냥 뒤척이다가 6시쯤 일어나 세면을 하는데 머리를 감기 위해서는 할 수 없이 강제샤워를 해야만 하는 상황 발생. 샤워기가 천장에 고정되어 있어서이다. 비누며 샴푸등이 인도 냄새를 품고 있다. 익숙치 않은 향이다. 구두솔 같은 칫솔과 인도 특유의 향이 느껴지는 치약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쓸 줄이야. 여기는 그래도 수도라고 1회용품을 제공했나보다.


   

아침 식사시간까지 약간의 시간이 있어 밝아오는 인도의 해를 보며 호텔근처를 돌아 다녔다. 가게 문을 열고 장사 준비하느라 모두들 열심이다. 공통점은 가게의 직원은 전부 남자다. 또한 길거리는 공사를 하다 중지한 것인지 원래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들쭉날쭉 파해쳐져 있고 먼지가 엄청 날린다. 물론 쓰레기는 예술적으로 거리에 뒹굴고 있다. 새벽인데도 차들은 경적을 사정없이 울려대고 요리조리 운전을 잘 한다. 아침식사는 커리를 날라가는 쌀밥에 비벼서 맛나게 먹었다. 인도 사람들 맛난 것 잘 해 먹고 산다.



       

730분 호텔을 출발. 이슬람의 흔적이 있는 꾸뜹탑으로 향했다. 가는 길 내내 경적소리와 먼지 자욱한 길을 요리조리 잘 피해 다닌다. 꾸뜹 미나르 유적군은 13세기 인도 최초 이슬람 왕조인 노예 왕조(Slave Dynasty) 시기에 만들어졌다. 붉은 사암으로 지은 알라이 다르와자(Alai Darwaza)가 유적군의 정문이며, 가장 유명한 유적지는 꾸뜹 미나르, 꾸와뜨 울 이슬람 모스크, 알라이 미나르이다. 꾸뜹 미나르는 술탄 꾸뜹 우딘(Qutbuddin)1193년 델리의 힌두 왕조를 패배시킨 기념으로 건설한 승리의 탑이다. 탑의 바닥 직경은 15m, 꼭대기는 2.5m로 위로 올라갈수록 가늘어지는 모양을 하고 있으며 높이는 73m에 이른다. 술탄꾸뜹은 그의 생에 첫 번째 층 밖에 짓지 못했고, 지금의 5층 탑은 후대 왕들이 증축한 결과물이다. 1~3층은 붉은 사암, 4~5층은 대리석과 사암을 사용했다. 기록에 의하면 탑의 상층부는 지진으로 인하여 두 번의 복원 작업을 거쳤다고 한다. 하지만 표면에 새겨진 섬세한 조각과 층을 구분하는 발코니는 지금까지도 훌륭하게 보존되어 있다. 이 탑은 벽돌탑으로 델리의 대표이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있다고 한다.



   

꾸와뜨 울 이슬람 모스크(Quwwat-ul-Islam Mosque)는 꾸뜹 미나르 탑 옆에 있는 인도 최초의 모스크다. 1193년 힌두교 사원을 무너뜨린 그 자리에 지어졌으며 후대 왕들에 의해 여러 가지 요소들이 추가되었다고 한다. 현재 상당수가 폐허가 되어 버렸지만 화려한 사암 장식들은 여전히 예술적으로 남아있다.


  

1192년 인도에 세워진 최초의 모스크로 알려진 쿠와트울 이슬람 사원(Quwwat-ul-Islam Mosque) 안뜰에는 7m 높이의 철기둥(Iron Pillar)이 있는데, 이 기둥은 꾸뜹 미나르가 지어지기 훨씬 전인 4~5세기 찬드라굽타 시절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기둥 내부는 철의 순도가 높아 2000년이 지나도록 전혀 녹슬지 않았는데, 학자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은 유적이다. 또한 당시 기술로 순도 99%의 쇠기둥을 어떻게 제작했는지도 불가사의다. 이 기둥을 만든 기술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이 쇠기둥에 얽힌 전설도 흥미롭다. 기둥에 등을 대고 양팔을 뒤로 젖혀 손가락으로 깍지를 낄 수 있는 사람에게 행운이 찾아온다고 한다. 지금은 기둥을 둘러싸고 울타리가 세워져 아무도 시도해 보지 못하고 있어 신비감을 더한다. 기둥에는 산스크리트어로 이곳이 굽타 왕국의 비슈누 사원 정원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런 인도에 우리의 포항제철이 제철소를 짓고 경영을 하고 있다니 참 거시기하지만 아무리 좋은 기술을 가졌어도 그걸 지켜내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알라이 미나르(Alai Minar)>

 

알라이 미나르(Alai Minar)는 꾸뜹 미나르와 모스크 북쪽에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데 알라우딘 킬지(Ala-ud-din-Khilji)에 의해 계획된 것이다. 그는 꾸뜹 미나르와 같은 모양이면서 높이는 2배인 승리의 탑을 짓고자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생애에 탑은 약 25m 정도밖에 완성되지 못했고 누구도 계속해서 공사를 진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곳은 원래 힌두사원이 있었는데 이슬람이 들어오면서 힌두양식 위에 이슬람 양식이 첨가되어 두 양식이 섞여있는 특이한 유적이다. 이런 유적처럼 종교전쟁이 없이 평화로워지면 좋겠다. 동서양 공통으로 종교시설에도 회랑이 있다.




돌로 만든 건물들인데 오랜 시간이 흘러 일부는 무너졌고 남은 부분의 천장을 보면 고구려의 고분 천장같이 엇갈리게 쌓아 올라가 봉분을 만든 것처럼 되어있어 무너지지 않았나보다. 기둥이 돌인데도 마치 나무처럼 조각을 해서 아주 멋진 예술작품처럼 보인다. 힌두교의 나라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에서 그것도 델리에서 이슬람 양식의 미나르가 있다니... 고대의 문화교류 내지는 침략의 증거로 남은 곳이리라. 이를 통해 아무리 무력으로 사상이나 종교를 강요해도 시민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침략은 결국은 실패로 끝난다는 사실.


<인디아 게이트>

 

인도문을 가기 위해서는 정부청사 밀집 지역을 지난다. 이곳은 다른 지역과 달리 가로수 꽃 들이 많고 청사마다 군인들이 총을 들고 경비를 서고 있지만 그리 위엄있는 모습은 아니다. 또한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 거지와 도시빈민들의 모습이 안 보인다. 길거리에서는 큰 대비자루를 들고 거리를 쓸고있는 청소부들이 일을 하고 있고 간간이 지나는 원형교차로의 꽃밭에는 예쁜 꽃들이 마치 야생화처럼 피어있다. 특히 정부청사 건물은 붉은 색 돌로 만들었고 예술적으로 만들어 회관을 보자 와!! 하는 탄성이 나온다. 정부청사와 1자로 쭉 뻗은 먼 곳에 인디아게이트(인도문)가 우뚝 서있다. 이 문의 양옆에는 1차 세계대전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용감히 영국군의 용병으로 나선전몰 군인 85000명의 이름이 벽면에 다 새겨져 있다고 한다. 게이트 가운데는 철모와 소총이 꽃혀있고 꺼지지 않는 불꽃이 나라를 위해 죽은 이들을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약속인 듯 훨훨 타고 있고 그 옆에는 군인이 총을 가지고 예를 표하고 있었다. 이곳이 관광지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오니 자연히 노점상들 사진사들이 모여들어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 먼지가 펄펄 날리는데도 간식거리를 팔러나온 노점상들은 음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먼지와 같이 공존하며 판다.



 <라지가트>

 

인도의 아버지인 마하트마 간디가 죽은 뒤 화장을 한 장소인 라지가트로 갔다. 화장된 간디의 유골은 인도 각지의 강에 뿌려졌다고 한다. 인도인들은 이 화장장소를 마치 간디의 묘소처럼 생각하나보다. 이곳에는 검은 대리석으로 놓았고 그 위에는 존경의 꽃다발이 놓여져 있다. 이곳을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한다. 그 입구에 신발보관소가 있다. 양말을 신고 들어가도 된다. 3월인데도 덥고 꽃도 활짝 피어있다. 잔디는 초록을 자랑하고 나무들도 푸르게 빛나고 있다.

   

다음으로 선택관광인 후마윤무덤을 갔다. 무굴 제국의 2대 왕인 후마윤의 묘이며, 1562~1570년 그의 아내 하지 베굼(Haji Begum)의 지시로 지어졌다고 한다. 페르시아 태생의 그녀는 페르시아 양식으로 가운데 묘를 둘러싼 네 방향의 정원과 수로를 만들고, 이 지방에서 구한 붉은 사암과 흰 대리석을 사용해 묘를 완성시켰다. 이러한 초기 무굴 제국의 건축 양식은 이후 지어지는 건축물에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후마윤의 묘에서 타지마할을 떠올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단지 안으로 들어서면 우측에 위치한 이사 칸(Iza Khan)의 묘는 후마윤의 묘보다 20년 앞서 만들어졌으며 팔각형의 둥글 납작한 모양을 하고 있다. 첫 번째 문과 두 번째 문을 통과하면 비로소 후마윤 묘가 있는 거대한 정원에 닿을 수 있다. 2층까지 올라갈 수 있고 후마윤이 매장된 곳에는 후마윤과 그의 부인을 비롯한 무굴 왕조의 주요 인물들이 잠들어 있다. 남동쪽 코너에는 이발사의 무덤이 있으며, 그 외에 무덤의 주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무덤은 왕과 왕가의 가족 무덤으로 왕의 권위를 위하여 그리 거대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백성들을 괴롭혔겠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이 지금은 많은 관광객을 끌어 모으는 즉, 돈이되는 사업으로 번창시켰네(???) 그 당시 사람들의 노고 덕에 현대인들은 무덤이지만 그 예술성과 아름다움을 느끼며 행복해 한다.


<후마윤 무덤>


<이사 칸(Iza Khan)의 묘>

 

관광을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현지 식당에 갔다. 마치 페스트푸드점 같다. 이곳 역시 전부 남직원들이다. 난과 커리로 점심을 해결. 이 커리도 보면 엄청 건강식이다. 난도 맛있는데 불에 탄 시커먼 것들이 너무 많아 털어내고 뜯어내고 먹었다. 아직 탄 음식의 해로움을 모르나? 식당 주변 길가에는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는 사람들이 노점에서 커리를 사먹고 있고 짜이를 파는 사람, 거리 이발사, 사탕수수 쥬스장사 들이 이국적 풍경을 만들며 그들이 우리 관광객들을 신기한 듯 바라본다.




점심 후 6시간에 걸친 자이푸르행 장도에 올랐다. 가도 가도 길 옆에는 간이 음식점과 가게, 자동차 수리소 등이 이어지고 간간이 보이는 교차로에서는 우리가 볼 때는 무질서의 극치를 보는 것 같은데도 이들은 아무 탈없이 잘도 순환이 되는 불가사의한 교통흐름을 보면서 경적소리 시끄러운 길을 달렸다. 두시간 반쯤 달려 생리현상을 해결하고 15분간 휴식을 취하는데 뒤로 나가보니 유채밭에서 수확을 해서 쌓아놓은 것이 보이고 휴게소 식당에서 하는 비위생적 설거지도 눈으로 실감나게 보았다. 델리를 한참 벗어나니 보이지 않던 산도 보인다. 물론 산에는 나무도 별로 없지만. 엄청난 운전솜씨로 요리조리 빵빵거리며 깜빡이 켜지 않고 빠져 나가며 자이푸르 시내에 진입. 퇴근시간이라 아주 작은 마이크로 버스 등 대중교통마다 콩나물 시루보다도 더 빽빽하게 사람들이 타고있는데도 사람들 표정을 보니 아무렇지도 않은 듯하다. 나 혼자만 걱정스러웠나보다. 730분에 저녁식사를 커리로 맛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