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짱이의 인도 네팔 유람기 4편 – 시크리성. 아그라성 가는 날
넷째날 – 2019. 3. 11(월) - 시크리성, 아르가성 가는 날
5시 기상. 6시 15분 아침식사. 7시 출발. 역시 간밤도 피곤에 지쳐 쓰러져 잘 잤다. 세면을 하는데 샴푸를 해도 마치 비누로 뻣뻣이 감은 질감이 드네. 일행 중 한 명이 배탈이 나서 아침을 안 먹는다고 한다. 외국에 와서 아프면 참 곤란한데... 아내도 어제 뭐를 잘못 먹었는지 호텔로 오는 도중에 고생을 했다. 그렇지만 먹어야 힘내서 관광유람을 하지. 나는 인도 음식이 다 맛있다. 골고루 먹어본다. 역시 굿~~!! 밥은 날아갈 듯 가볍고 푸석푸석하지만 커리를 비벼 먹으면 밥맛이 난다. 날씨와 관련이 있어 그런 종자인가 보다. 쌀이 찰지면 바로 상할테니까.
아침 식사 후 아그라의 시크리성을 향해 출발. 이른 아침인데도 사람들이 아주 많이 이동한다. 각종 교통수단들이 도로를 무질서하게누비며 사람을 짐짝취급을 하더라도 얼굴 표정엔 불편함이 없다. 시크리성을 가는 길에 잠깐 샛길로 빠져 우물을 아주 거대한 우물을 보러갔다. 인도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그런 곳이다. 현지 가이드 선택관광으로 15불이다. 계약서 및 안내에도 없는 곳이다. 그러나 와볼만 하네. 도대체 여행사에서는 왜 이런 곳을 선택관광도 아닌 현지 가이드에게 맡기는겨? 처음부터 코스에 넣으면 될것을... 현지여행사 수익잡으라고? 하여튼 거대한 우물인데 아마도 종교행사와도 관련이 있을듯하다 또한 왕위 권위를 한껏 올리는 무대로도 활용했으리라. 그러고보면 예나 지금이나 이벤트의 중요성이 똑같다. 하긴 시대와 사람들만 바뀌었지 하는 짓은 똑 같다.
<찬드 바오리 우물>
역시 관광지다 보니 주변에 노점상과 걸인들이 많다. 깊고 거대한 우물을 만들어 주변 사람들에게 공급했다고 한다. 지금은 녹색 이끼가 잔뜩 끼었고 비위생적으로 보인다. 그러니 지금은 단지 관광용으로 활용. 계단우물은 사막지대인 라자스탄 주에 많다고 한다. 라자스탄 주는 건기에 비가 한방울도 내리지 않는다고 한다. 이러니 우물을 만들 수 밖에. 이 찬드 바오리 우물은 8~9세기경 이 지역을 다스리던 찬다 왕이 만든 우물이라고 한다. 13층 높이의 우물의 깊이는 대략 30미터이며 3,500개의 계단으로 이뤄져 있다고 한다. 인도의 계단식 우물 중 가장 오래되고 깊은 우물 중 하나라고 한다. 계단 아랫부분은 주변 온도에 비해 5~6도는 서늘했기에 날씨가 더울 때면 마을 사람들이 우물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 우물 역시 자연조건을 최대한 이용한 것이리라.
이곳 역시 힌두사원의 흔적이 많다. 회랑으로 둘러 쌓여있는데 부서진 기둥 및 벽 장식물들을 회랑에 전시해 놓았다. 우물 구경을 마치고 나와 사원을 향해 나갔다. 사제가 귤색 옷을 입고 있다. 이 사원도 규모가 꽤 컸었을텐데 주변을 보니 부서진 흔적들이 사원을 둘러싸고 있다. 복원은 어려울 듯 보인다. 엄청난 자금과 시간 노력이 필요한 듯 보인다.
아그라로 가는 길 양옆은 농촌이라 밀이 자라고 유채를 수확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전부 여자들이 일한다. 허~~ 남자들은 어디갔는고?? 가는 길이 고속도로라고 하는데 모든 차량이 통행하고 톨게이트에서는 차들만 돈 받고 오토바이는 무료통과한다. 길가의 농가에서는 소똥을 둥근 피자처럼 만들어 말리는 광경이 주욱 이어졌다. 소똥을 연료로 쓰기 위해 작업을 하는 것이다. 또 어떤 집은 지붕에도 쌓아놓고, 어떤 집은 대문 옆에 소똥을 집가리 쌓아놓았는데 그 모습이 예술이다. 어디든 자기 집은 예쁘게 꾸미고 싶은가 보다. 아니 그런데 길거리에 쓰레기는 어떻게 봐야하나???
가는 도중에 휴게소라는 곳을 들렀다. 주변에서 쓰레기 태우는 냄새가 얼굴에 베일 정도다. 각종 잡화를 팔기도 하는데 사고픈 생각이 안든다. 물가는 우리 물가와 비슷하다. 녹차세트를 사려고 했더니만 값이 대단하다. 그럴바엔 우리의 보성녹차가 훨씬 위생적이고 합리적이라 생각이 들었다.
시크리성에 도착하기 전에 점심을 먹는데 이 식당이 마치 영화속에 나오는 그런 가든형 뷔페다. 음식도 훌륭하고 식당 자체가 정원을 꽃으로 예쁘게 가꿨고 오랜만에 녹색이 눈에 시원하게 들어오니 마음이 평온해 진다. 벌레들이 날아들지 못하게 하려고 향을 피우지만 틈은 어디든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모처럼 평안하게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주인공으로 영화한편 찍었네. 하하하~~~
따가운 햇살을 헤치며 파테푸르 시크리성으로 가는데 주차장에서 내려서 셔틀버스를 타고 간다. 이 성은 승리의 도시이자, 유령도시인 파테푸르 시크리(Fatehpur Sikri)이다. 내리쬐는 뙤약볕을 맞으며 성안에 들어가니 규모가 대단하다. 붉은 사암으로 만든 성겸 궁전이다. 인도 궁전의 특징인 좌우대칭 사각형의 뜰 여인들의 공간 등이 있다. 이 성의 구조를 보면 접견실이 있고 은행도 있고 왕의 침실 등등 전부 붉은 사암으로 규칙적으로 지어졌고 제일 높은 곳은 5층으로 각 층마다 용도가 다르다. 뒤쪽으로 가니 녹색 정원이 붉은 사암으로 만든 궁전을 한결 평화롭게 만든다. 이 지역이 물부족으로 시달리는 곳인데 이런 대규모 궁전시설을 지었다는 것은 국력낭비의 대표사례가 아닐까? 하지만 그 시대의 과학기술과 지혜를 총 동원하여 자연친화적으로 활용한 것을 보면 인간의 능력은 무한대 인듯하다. 인류의 진화는 어디까지일까?
이곳은 지난 400년간 버려졌던 유령도시로 1570년부터 14년간 무굴제국의 수도였던 곳이다. 무굴제국 3대 황제인 악바르가 대를 이을 아들이 없자 이곳 시크리에 사는 성자 ‘살림 치스티’를 찾아가 그의 예언대로 후세를 얻은 것이다. 이 아들이 바로 4대 자항기르 황제가 된다. 후세를 얻은 감사의 의미로 악바르가 살림 치스티의 부탁을 들어 수도를 이곳으로 옮겼다가 14년만에 다시 아그라로 옮기게 된다. 아마도 물 부족이 원인인 듯하다. 그리하여 유령도시처럼 되었다가 현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3만의 인구가 살고 있다고 한다. 살림 치스티가 시크리를 영원히 살렸구먼~~ 건조하고 물도 부족한 곳에 누가 살겠으며 뭘 보러 오겠는가. 그런 척박한 곳에 거대한 궁전을 지어놨으니 볼거리가 아닌가?
이렇게 설립된 시크리성은 궁전지역과 사원지역으로 나눠져 있고, 도시는 관광지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악바르 황제의 첫째 왕비는 이슬람인, 둘째는 카톨릭, 세 번째는 힌두왕비로 각 지역의 종교문화를 포용하는 정책에 따라 건축물도 3개 종교 양식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버려진 도시는 많은 고대의 건축물들이 남아 있으며, 고고학을 위해 보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한다.
파테푸르 시크리는 무굴제국의 건축물들의 가장 좋은 실례이며, 높이에서 무굴 건축물의 웅장함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비록 도시는 황폐해졌지만 아그라를 방문하는 여행객들은 반드시 거쳐야할 장소이다. 파테푸르 시끄리는 힌두와 이슬람 건축물의 절정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보기이며, 파테푸르 시크리의 모스크는 메카 사원의 견본이 되어 페르시아와 힌두 건축물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여기에서도 인생이 동전의 양면이듯이 유령의 도시가 관광의 도시가 되고 건축술이 발전 전파되고 진화한다.
3월인데도 아주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시크리성을 보고 아그라성을 향해 다시 출발. 아그라시는 역대 인도 제국의 수도였었다고 한다. 가는 길은 좁아도 차들은 거침없이 곡예운전을 하며 목적지를 향해 잘도 간다. 사람과 자동차들이 소들과 어울려 그림을 보여준다. 아그라 성에 도착하니 아니...??? 이럴수가??? 사람들이 정말 바글바글 많다. 주변에는 거리의 노점상 등등 사람들로 빡빡히 채워진듯하다.
이 성 역시 사암으로 만든 거대한 예술작품이다. 동서양 성의 구조가 비슷하다. 해자가 있고 성문이 있고 성문을 보호하는 옹성이 있는 것이다. 들어가는 입구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거대한 회랑도 있고 성이 알파벳 D자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관람 동선을 따라 이동하며 건축물의 정교함과 문양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힌두, 이슬람, 불교의 각 양식을 적용하여 예술성과 시대성을 보여줬고, 오늘날 종교로 인한 전쟁과 갈등이 안타깝게 다가온다.
아그라 성은 악바르 황제가 1565년부터 시작하여 1573년에 완공하였으며 1세기 후에는 아우랑제브(Aurangzeb) 황제가 성곽 외부에 해자를 만들었다. 야무나 강 서측 강변에 위치한 이 거대한 성채는 평면 형태가 불규칙한 반원형으로 되어 있으며 강변에 면한 직선으로 된 성채 부분의 길이는 810m이다. 치석이 잘된 적색사암으로 축조된 이 성채는 높이 21~30m이며 요소마다 반원형 평면의 능보(稜堡)가 돌출되어 있다. 성의 전체 길이는 2.4㎞이며 매우 정교한 건축계획과 공법으로 건설되어 있으며 전부 적색사암이 사용되어 레드 포트(RedFort)라 지칭하기도 한다고 한다.
이 성을 건설 당시만 해도 전쟁으로 인해 군사요새의 성격이 강했지만 악바르 이후 4대 황제 제항기르(Jehangir)와 5대황제 샤자한(Shah Jahan)황제의 평화로운 치세가 이어져 이곳에서 실제 외국과의 전투는 없었다. 그러나 그후 1859년 인도인들의 세포이 항쟁을 영국군이 진압 한 후, 연이어 아그라성에 포격을 가하여 무굴제국을 굴복 시키고 아그라성에 부대를 주둔시켜 아그라성의 궁전 내부에 장식된 보석들이 대부분 약탈했다고 한다.
5대 황제 샤자한은 황제가 된 이후에 자신의 재능을 최대한 발휘해 아그라성을 세계에서 제일가는 멋진 궁전으로 변모 시켰지만, 말년에는 6대황제인 셋째아들 아우랑 제브(Aurangzeb)에 의해 왕위를 빼앗기고 아그라성에 감금된 후 그곳에서 타지마할을 바라보며 쓸쓸한 최후를 맞이했다고 한다. 아들 아우랑제브 황제의 마지막 호의로 부인 뭄타즈의 곁에 함께 하게 되었다. 아이구 권력이 뭔지... 하긴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눠갖지 않는다고 했으니 말 다했지 뭐. 민주국가에서는 권력을 분산하여 상호 견제를 통해 체제를 유지해 나가는데 북한은 신이된 지도자가 돼지임금처럼 지랄발광을 하고 있으니 권력의 무상함을 얼른 깨닫고 반성하며 북한 주민들을 자유롭게 살 수있게 하길 바랄뿐이다. 무굴제국 후계자 계승은 정권 이양이 아니라 철저한 능력제로 결정 된다. 따라서 왕권 교체기에 혈육간의 전쟁은 피할수 없는 일이고, 무굴제국 내내 끝없이 피를 부르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무굴제국의 정권이양은 한번도 평화롭게 이루어 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동서고금이 똑같군. 권력의 유혹이 그만큼 강할뿐 아니라 모든걸 다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 그 권력을 얌전히 내려놓겠냐고???? 절대로 안 내려놓겠지. 그러니 북한정권의 민주화는 어렵다는 것이지. 지가 신보다 더 위대한데 그걸? 어림없는 소리아닌가. 그렇지만 우리는 북한주민의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위한 다양한 노력을 계속 해야한다.
아그라성 남쪽 입구인 '아마르 싱' 게이트(Amar Singh Gate)를 지나면 경사로가 있는데 이는 적의 대부대나 코끼리가 침입시 기름을 붓고 불을 질러 방어 하기 위한 설계 라고 한다.
제항기르 펠리스(Jehangir's Palace)는 3대황제 악바르가 어렵게 얻은 아들인 살림(Salim, 4대 황제 제항기르의 아명)을 위해 지은 건물 이다. 힌두 아프칸 양식의 건물이다. 하여튼 왕들이 대규모 건축토목사업을 일으키면 재정파탄으로 국운이 기울던데...
<제항기르 팰리스>
<디와니카스 내부>
<디와니카스 외부>
디와니카스는 샤자한이 1636~ 1637년 세운 건축물로 개인 접견실이며 고위관리나 외국대사들을 만날때 사용 됐다. 하얀 대리석으로 튼튼하게 또한 화려하게 만들었고 게다가 전기도 없던 시절 자연의 원리를 이용한 분수와 에어컨 바람까지 만들었으니 외국 사신들이 오면 입이 떡 벌어져 기가 죽었을 것 아닌가? 이런 소문이 퍼져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아 나서는 대항해시대의 물결이 전 유럽에 난리를 쳤겠지? 인도가서 한몫 잡자 하고서 말이다.
<무삼만 버즈>
무삼만 버즈는 '포로의 탑' 이라는 뜻인데 샤자한이 아그라 성에서 타지마할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서 사랑하던 뭄타즈를 그리며 마지막 8년을 보낸 곳이다. 타지마할 까지의 거리는 약 2.5 km 정도로 맑은 날이면 선명 하게 보인다.
후궁들이 사용 하던 궁전 내부에 환기구 겸 창문으로 황궁의 여인들이 이 창문 안쪽에서 밖을 내다 볼수 있었다. 샤자한의 딸 '자하나라' 공주도 함께 유폐 되었다고 한다. 후궁 및 왕족들의 거처와 넓은 정원. 하긴 이런 뜰이라도 있어야지. 매일 궁에 갇혀 사는 불쌍한 인생들이었으니까.
<후궁과 왕족들의 거처>
이 성이 유명한 이유 중의 하나가 스토리가 있다는 것이다. 황제 샤자한과 왕비 뭄타즈의 러브스토리가 지금껏 회자되고 극장에서 공연되질 않는가. 우리도 평강공주와 온달장군 이야기를 관광자원으로 삼는 단양의 온달성같은 사례들을 많이 발굴해 내야 될 것이다.
나오는 길에 다람쥐 모이 주는 모습을 보는 사람에게 손위에 먹이를 얹어주고 다람쥐가 먹이를 먹게 하고는 그 댓가로 1달러씩 받는다. 다람쥐들은 거리낌 없이 사람의 팔에 앉아 먹이를 먹는다. 또 그것을 이용해 먹이를 주고 돈을 받는 직업도 있네. 사람도 많고 직업도 다양하고.
호텔로 이동하는 길 역시 인산인해에 무질서 속의 질서가 있는 도로를 곡예운전하면서 도착. 호텔 앞은 도로포장 공사중이다. 가방을 방에 넣어 놓고 6시 30분 민속쇼를 보기위해 극장으로 출발. 극장까지 5분도 안걸린다. 공연장은 대규모이지만 공연 내용은 타지마할에 관한 내용으로 사랑에 모든 걸 포기한 왕의 이야기로 꾸며졌다. 공연내내 졸음과 싸우며 봤다. 마지막에는 인도국기를 흔들며 돌아 다닌다. 아니 왜 그러는겨?? 인도국기를 왜 흔들어?? 이해가 도망가네???? 중국의 민속공연과 비슷한 면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한국인들이 관람을 많이 하는지 헤드폰을 통해 우리말로 들을 수 있는데 번역 및 말투가 이상하여 감동이 안되었다.
<민속공연장 입구>
호텔로 돌아와 늦은 저녁을 먹는데 음식의 질과 종류가 너무나도 별로다. 유명 관광지라서 그런가? 점심까지는 좋았는데...질이 떨어지니 실망감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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