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짱이의 인도 네팔 유람기 6편 – 카주라호에서 바라나시로 이동
여섯째날(2019. 3. 13. 수) - 카주라호에서 바라나시로 이동
시원할 때 사원군을 보기위해 아침을 먹지 않고 6시 30분 일찌감치 떠났다. 입구 양옆으로 움막처럼 지은 곳에서 잠을 자는 모습, 저수지에서 기도하기 전에 목욕하는 모습, 아침 장사 준비하는 상인들 등 움직임이 많다. 서부 사원군에 있는 여러 사원을 둘러 보는데 힌두 신을 모신 곳으로 신발을 벗고 신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 사원군은 인도-아리안 건축 양식의 걸작으로 꼽히는 카주라호 사원군으로 9세기부터 13세기 사이에 번성한 찬델라 왕조에 의해 건설되었다. 찬델라 왕조는 전성기인 950~1050년 사이에 수도인 카주라호에 무려 85개의 사원을 세웠지만 상당수가 이후 이슬람 세력에 의해 파괴되었다. 현재 카주라호에 남아 있는 22개의 힌두교와 자이나교 사원들은 마을의 서부, 동부 그리고 남부에 흩어져 있다.
카주라호 사원군이 유명해진 것은 외벽을 따라 빼곡하게 자리한 조각들이다. 특히 ‘미투나’라 불리는 에로틱한 조각들은 각기 다른 체위의 노골적인 성교 장면을 표현하고 있어 보는 이를 놀라게 한다. 뿐만 아니라 층층이 띠처럼 조각된 신과 여신, 병사, 음악가, 동물 등의 조각들이 천 년 전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사원은 사암을 일일이 다 깎아서 만든 거대하고 아름다운 탑이다. 1000년전 찬델라 왕조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이 왕조가 최고의 번성기를 누렸던 흔적이 탑에 남아있는 것이다. 이 탑들은 중세 인도 예술의 보고로 평가된다고 한다. 번영기에 사원이 85개나 있었는데 현재는 22개 사원만 남았다고 한다. 부자가 망해도 3년 간다고 했는데 1000년 전의 영화가 현재 남아있는 사원에 투영되는 듯하다.
칸다리아 마하데바 사원은 카주라호 사원들 중에 가장 거대하고 예술적 건축학적으로 가장 훌륭하다고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그렇지 문외한이 봐도 경탄이 절로 나오는데 오죽하랴. 그나저나 아무리 최 번영기 왕조가 사원을 건설했다고 해도 천문학적 경비가 들어갔을텐데 혹시 이런 사원 건축으로 국가 재정이 부도나 나라가 망한 거 아녀? 괜한 걱정인가? 그 당시 사람들의 의식도 모르면서 현재의 생각으로 지래 짐작하는 것은 아닌지...
지도자는 국민들의 평와와 안전된 생활을 위해 비젼을 갖고 제시하여 국민들로 하여금 희망을 작게 해야 되는데 고대의 국가들을 보면 사치 향락에 빠지거나 거대한 건축 토목 사업으로 나라가 기울어 지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설령 왕실과 왕의 권위를 내세우기위해 신의 이름을 빌려 거대한 사원을 그렇게나 많이 지었다면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흡혈귀에 불과할 것이다. 이에 백성들이 불복하면 무자비한 탄압으로 억눌렀을 것이고 그것을 본 백성들은 왕의 권력에 감히 대항할 엄두를 못내게 되어 지배층이 원하는 대로 왕과 왕실의 강요된 권위가 수립된 것이다.
이 사원에는 가장 에로틱한 조각들이 수많은 조각품들 사이에 있어 웃음을 자아나게 한다. 오늘날 애로물 즉 성인물들이 바로 이런 것을 보고 묘사하는 것이라리??? 그럼 왜 사원 벽면에 이런 선정적이고 적나한한 성행위 모습을 묘사해 놨을지 궁금하지 않은가? 인간의 성욕과 성행위를 통해서도 최고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인가? 거의 모든 종교가 금욕을 강조하는데 어찌 힌두신은 성행위 모습을 사원벽에 새겼을까?
사원을 장식하는 〈미투나상〉도 난교의 흔적이 아닐까? 미투나는 남녀의 성적 교합을 소재로 한 조각을 의미하는데, 조각 대부분이 다양한 성적 유희 장면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일대일 성교만이 아니라 세 사람 이상이 한데 엉켜서 성의 환희에 빠진 조각도 있고 여러 쌍이 동시에 성교하는 모습도 볼 수 있는데 심지어 말과 성교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사원 안에 남근의 상징이 모셔져 있기도 하다. 미투나상에 대해 마하트마 간디가 “모두 부숴버리고 싶다.”고 했을 정도로 노골적 난교 장면이 가득하다. 아니 간디는 한가지만 생각했나? 역사성과 종교적 의미를 몰랐단 말인가 아니면 무시했다는 말인가?
이 미투나상을 새겨놓은 이유를 예상해보면 섹스를 통해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설명하는 탄트리즘(음과 양, 남과 여, 정신과 육체, 절대자와 피조물의 합일을 통해 마음의 평화와 완전성인 해탈로 이를 수 있다는 사상)의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짐작할 수 있다. 성생활은 천고 불변 조화의 법칙을 표현하는 것으로 남녀의 성적 화합은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의 본질을 이루며, 따라서 성인(聖人)이나 성직자는 성교 기술을 적극 계몽하는 역할을 한다. 이는 당시의 비위생적인 상태등을 고려했을 때 일리가 있는 추정이다. 《카마수트라》는 이를 집약한 힌두교 경전 중 하나다. 이 경전의 반 가까이 되는 분량을 육체관계를 비롯하여 정신적, 감정적 결합에 이르는 사랑과 남녀 간의 완전한 결합에 관한 설명이 차지하고 있다. 왜? 성적 만족은 원초적 욕망을 충족시켜주며, 원활한 성생활이 이루어져야 정신적 수양은 물론 사회적 역할도 제대로 수행할 수 있기 때문임을 강조한 것이 아닐까? 특히 성은 원초적이어서 아무런 준비가 필요 없기에 더욱 중요하다. 섹스는 식자나 무식자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모두에게 통용될 수 있으므로 모든 인간의 해탈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성적 자극과 육체적 욕망을 숨김없이 만끽하고 벌거벗는 것을 즐겼던 원시사회의 난교 흔적이 종교를 통해 오랫동안 유지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이래서 힌두교가 대중의 지지를 받지 않았을까? 너무나도 인간의 욕망을 꾀뚫어 보고 그것을 파고 들었기에....그럼 우리나라에는 이런 경우가 없었을까?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유사》에 담긴 신라 헌강왕 때 처용이 지었다는 향가인 〈처용가〉 내용을 원시 난교의 흔적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고 한다. 인간의 본능은 동서양이 마찬가지로다.
서부 사원군 관람을 이른 아침 맑은 공기 속에서 마치고 나오니 현지인들이 입장을 하려고 줄을 서있는데 주로 여인들이다. 관광객인 우리가 신기한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전 세계 어디나 마찬가지 현상이로다. 그런데 인도인들은 한결같이 눈빛이 예쁘고 강렬하다. 강력한 광선이 나오는 듯하다.
동쪽 사원군으로 갔다. 이곳은 자이나교 사원 3개가 있는데 일부는 사암 조각품으로 되어있고 나머지 대부분은 콘크리트로 되어있다. 아마도 힌두사원이 다 부서져 황폐화 된 것을 자이나교도들이 자신들의 사원으로 사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봤다.
자이나교에 대해 간략히 공부해 본다면
자이나교는 BC 6세기경에 바르다마나(Vardhamana)가 당시의 정통 베다(초기 힌두교) 의례에 반대해 창설한 인도의 종교이자 철학이다. 자이나교를 처음 주창한 사람들은 베다 시대의 동물 희생제에서 만연했던 살생 관행과 관념에 반기를 든 한 종파에 속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창조신을 믿지 않는 자이나교는 아힝사(ahimsa)의 교리, 즉 어떠한 생명도 살상하지 않을 것을 윤리의 핵심으로 삼고 인간의 본성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주로 고행과 수도생활을 통해 성취해야 할 종교적 이상으로 여기고 있다고 한다. 자이나교는 생명 있는 존재를 해치지 말 것, 거짓말을 하지 말 것,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지 말 것, 사유재산을 소유하지 말 것, 금욕을 지킬 것 등 다섯 가지 기본적인 계율을 가르쳤다. 이 가운데 처음 네 가지는 마하비라 이전에 있었던 다른 스승들이 이미 가르쳤던 계율이며 오직 다섯 번째만이 그가 추가한 것이다. 또한 이 다섯 가지 계율은 불교의 오계와도 유사하다.
자이나교에서는 이 다섯 가지 계율 중에서도 생명 있는 존재를 해치지 말라는 불살생 또는 불상해의 계율을 가장 강조했다. 그렇기 때문에 후대의 자이나교도들은 땅속의 벌레들을 해칠까봐 농사를 짓지 않고 오직 상업에만 종사하고 철저하게 채식 위주로 생활했다. 후에 자이나교는 오직 흰색 옷만 입는 백의파(Shvetambara)와 어떠한 옷도 걸치지 않는 나의행파(Digambara)로 나뉜다.
자이나교는 희생제와 같은 제식을 거부하고 특히 불살생 또는 불상해의 계율을 강조함으로써 전쟁과 농사를 부정했다. 그 결과 상업에 종사하는 바이샤 계급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지만 신을 인정하고 신분의 차이를 어느 정도 인정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브라흐마니즘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자이나교는 비록 인도의 여러 지방으로 전파되면서 왕들의 지원을 받기도 하였지만 후대로 갈수록 전래의 브라흐마니즘 속에 흡수되고 말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자이나교는 오늘날의 인도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자이나교와 유사하면서도 브라흐마니즘에 더욱 철저하게 반대했던 불교는 훨씬 빠른 속도로 인도를 비롯한 전 세계로 퍼져나가기는 했지만 그 발생지인 인도에서는 소멸되는 아이러니컬한 결과를 맞이했다.
자이나교도들은 옷도 입지 않고 벌거 벗은체로 해가 있는 동안만 음식을 먹고 땅속에서 나오는 식재료는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불살생의 실천이라고나 할까? 사원 내의 각 기도처에는 내 눈으로 볼 때 부처님인데 모셔져 있고 중앙 신전에는 거대한 남자 나신상이 서 있고 그 앞에서 의식을 진행하고 있었다.
사진을 찍고 다니니가 사원의 종사원인지 아닌지는 모르겟으나 따라 다니면서 여기도 찍고 저기도 찍으라고 안내한다. 덕분에 여기 저기 찍었지만 결론은 돈을 내라고 한다. 돈은 내가 내고 싶을 때 내는 것이지 내가 원치도 않는데 낼 수는 없다.
독특하지만 생명존중의 사상을 극도로 실천하는 자이나교 사원을 둘러보고 호텔로 돌아와 아침을 먹었다. 역시 난과 커리가 최고다. 이 음식이 인도에 최적화 된게 다 이유가 있으리라. 인도인들은 매 끼니마다 새롭게 해 먹는다. 그 이유는 무더운 날씨로 인한 음식보관의 어려움 때문일 것이다. 이러니 여인들의 고통은 심하겠지만 그 심한 무더위도 이겨내지 않을까 역설적으로 생각해 봤다. 인도인들은 고기보다는 주로 채소를 이용한 커리를 더 자주 많이 먹는다고 한다.
호텔은 Golden Tuilp으로 모든 시설들이 훌륭하고 조경 및 각종 소품등으로 아름답게 만든 호텔이다. 방도 크고 제일 멋지고 편한 호텔이었다.
9시 10분 바라나시를 향해 출발. 예상시간은 12시간. 운전기사의 운전솜씨가 그야말로 베스트드라이버요 예술이다. 인도 어디든지 차들이 추월할 때는 경적을 울린다. 조심하라고 신호를 주는데 예전의 중국과 똑같다.
바라나시로 가는 길의 풍경은 공장 하나없는 농촌과 농촌마을을 지난다. 작은 시골마을로 들어가면 어김없이 시장과 많은 사람들로 좁은 거리는 북적거린다. 이런 도시를 수업시 지나 꼬불꼬불 급커브길을 오르고 내리며 들판을 지나가고... 농촌 집 앞에는 소똥을 말려 차곡차곡 쌓아 놓은 것들이 아주 자주 목격된다. 꼬불꼬불 산길에서는 원숭이 무리들이 길가에 나와 앉아 사람들을 구경한다. 힌두 신 중에는 원숭이 신이 있기에 함부로 하지 않고 잘 관리하나보다.
사탕수수밭을 지나다가 멈춰 사탕수수 맛을 보게 되었다. 때마침 길 건너에서 노인이 염소 몇 마리를 몰고 가는데 그 모습이 너무도 멋있고 한 편의 그림이고 또 한 편으론 안쓰럽고 복잡한 감정이 들었지만 멋진 장면을 그냥 놓칠 수없어 사진을 찍었다. 물론 허락을 받고. 그랬더니 나중에 돈을 달랜다. 기분이 상해 모른척하고 말았다. 한국인들의 단점 중에 하나가 미리 짐작하고 인정을 퍼부어 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그 할아버지가 아예 염소들을 버리고 돈벌이 모델로 나설까봐 돈을 안드렸는데 일행이 1달러를 주고 사진을 찍네? 아니 그럼 나는 뭐가 되나?? 내가 잘못인가?
사탕수수 맛을 보기 위해 껍질을 까서 씹으니 단맛이 확 올라온다. 즙을 짜서 마시면 더 좋은데...
12시 30분이 지나서 길가 허름한 휴게소에서 점심으로 싸온 도시락을 펼치고 커리를 난과 함께 먹는데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다 애들이다. 학교 안가고 여기서 일을 해? 어린이 노동? 실감나네...
도시락의 구성품은 밥, 샌드위치, 계란2개, 쥬스 1개, 바나나 2개, 디저츠빵 1개, 삶은 감자, 과자 1봉 이렇게나 많이 들어있다. 이걸 어떻게 다 먹나? 배 터질라. 도시락은 조금만 먹고 따로 주문한 따뜻한 나과 커리를 먹었다. 역시 굿~~ 가이드 말로는 호텔보다도 더 맛있다고 한다. 인공이 덜 첨가되었다고 하네.
점심 후 또 출발. 가는 도중에 사과, 포도, 귤을 사서 먹으며 가다가 가이드가 구아바를 사서 나눠 줬는데 맛이 새롭다 이것 역시 굿~~. 물론 가이드에게 물과 과일값으로 20달러를 선지급해서 짜이, 과일, 간식들을 사 먹는 것이다. 인도인들은 과일을 씻지않고 털어서 그냥 껍질채 먹는다. 그 먼지를 대충 털고 먹는다????
가다가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화장실에 들렀다. 우와~~ 대단하다. 냄새에 시설에~~ 환상적이다??? 이왕 쉰김에 짜이를 한 잔 하러 갔다. 우유에 강황, 생강, 계피, 설탕 등을 넣고 끓여주는데 조리도구를 보니 비위생의 극치. 짜리를 담는 컵은 1회용 진흙으로 만든 것인데 잘 부서지는 자연 친화적인 컵이다. 인도인들은 짜이를 하루에 5잔 이상씩 마신다고 한다. 물론 값이 싸기도 하고(1잔에 180원 정도) 무더위에 힘을 얻는 동력이 되기도 하겠다. 또 간식거리도 사먹는데 삶은 감자를 으깨 커리에 섞어 튀겨낸 것을 먹어봤다. 맛은 역시 굿~~ 또한 양파튀김도 아주 훌륭하다. 작은 고추도 곁들여 주는데 씹어보니 아주 대단히 아주 맵다. 이 모습을 보더니만 운전기사가 얼른 먹으라고 장난을 건다. 우리가 매워 쩔쩔 매는 걸 보더니만 재미있나보다. 그냥 같이 허허 웃었다.
아직도 갈길은 멀다. 수 많은 도시를 지나고 들판도 지나고 어둠이 내려 왔다. 길이 안보이는데도 운전을 기가 막히게 잘 한다. 어느 곳을 지나는데 차가 못가고 서있는 것이다. 중앙선 무시하고 마구 달리니 철도 건널목에서 막혀있는데 사람들이 그 밑으로 자전거를 끌고 빠져 나간다. 몇 분후에 기차가 지나간다. 20칸을 단 여객열차이다. 열차가 지나간 후도 차단기가 바로 올라가는게 아니다. 그냥 몇 분 동안 차단기가 안 올라간다. 가도 가도 차들이 줄지어 서있는 것이다. 닫ㅂ이 안보이니 운전기사가 전방 상황을 살피더니 차를 후진하여 되돌려 우회길을 찾아 나선다. 그 우회길은 동네길로 좁고 위험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 차는 아주 쌩쌩 잘도 달린다. 거의 12시간이 흘러 바라나시 매롯호텔에 도착했다. 바로 늦은 저녁을 9시 넘어서 먹기 시작. 현지 가이드는 역시 늦더라도 기다렸다가 금방 만든 난과 커리로 저녁을 먹는다. 저녁을 맛나게 먹고나서 방으로 들어오니 얼래?? 방이 왜 이리 작고 좁아? 한국의 모텔이 훨씬 훌륭하네.
내일 아침은 갠지즈강 일출을 보기위해 4시 30분 기상, 5시 15분에 출발이다. 으나 몹시 피곤하다. 푹 잘 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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