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입춘 강추위 몰아친 날 남산
입춘 날 최저 영하 9도에 바람이 차갑게 몰아친 날 하늘맑은 남산에 올랐다.
이시영 선생 동상 - 이시영(李始榮, 1869년 12월 3일 ~ 1953년 4월 17일)은 조선, 대한제국의 관료이자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본관은 경주로, 자(字)는 성흡(城翕), 성옹(聖翁), 호는 성재(省齋)·시림산인(始林山人), 본명은 성흡(聖翕)이다. 총리대신을 지낸 김홍집의 사위이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 독립 운동에 투신, 일가족 40인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고, 1919년 9월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후 김구, 이동녕 등과 함께 임시 정부를 수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광복 이후 귀국,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임정 요인이 단정론과 단정반대론으로 나뉘었을 때는 단정론에 참여하였다. 1948년 7월 24일부터 1951년 5월 9일까지 대한민국의 제1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제2대 대통령선거에 민주국민당 후보로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했다.
김구 주석 동상 - 김구(金九, 1876년 8월 29일 (음력 7월 11일)~1949년 6월 26일)는 일제 강점기 한국의 독립 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 호는 백범. 백범이라는 호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지었다. 1931년에 독립 운동 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의 동경 의거,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사건 등을 지휘하였다. 1926년 12월부터 1927년까지 1930년부터 1933년까지 임시정부 국무령을, 이후 국가평의회 의원, 내무장, 재무장 등을 거쳐 1940년 3월부터 1947년 3월 3일까지 임시정부 국가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임시정부 법통 운동과, 이승만, 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과 미소 공동위원회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1948년 4월 19일부터 5월5일까지 평양을 방문하여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남북 협상에 참여했다.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치뤄지자 정치와 거리를 두고 건국실천원양성소 등 청년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1949년 6월 26일에 사저 경교장에서 안두희가 쏜 흉탄에 서거하였다. 대한민국 최초의 국민장으로 장례가 엄수되었고 7월 5일 자신이 순국선역들의 유해봉환을 추진하며 조성하였던 용산구 효창동 애국선열묘역에 모셔졌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 -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목 영동방 청풍리(현 황해남도 해주시 광석동)에서 아버지 안태훈(安泰勳, 1862~1905)[14]과 어머니 배천 조씨(白川 趙氏) 조마리아 사이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안중근은 태어날 때 등에 검은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응하여 태어났다고 하여 어릴 때에는 '응칠(應七)'로 불렸다. 전형적인 무골로 어렸을 적부터 무술을 연마한 것으로 유명하고, 사격의 명수였다. 일제의 침탈이 사실상 국권을 뒤흔드는 수준으로 확대되자 항일무장투쟁으로 노선을 바꾼 안중근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후, 우덕순과 더불어 의군을 조직하였다. 처음에는 회령 방면으로 진출하면서 몇 번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나, 스파이의 거짓 안내와 병력 열세 등 모든 면에서 불리했기에 결국 패배하고, 우덕순은 일본군에 잡히게 되며, 자신과 몇몇 동료들만 목숨만 건져 가까스로 살아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로 가까스로 남은 11명의 동지들을 모아서 약지를 자르는 단지동맹회를 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로 맹세한다. 1909년 10월 26일 9시 30분,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
안중근 의사 동상
한양도성 남산구간 역사 전시관
청와대 북한산 방면 전경
인왕산 안산 방면 전경
여의도 방면 전경
목멱산 봉수대
남산 팔각정
일본 통감 관저터에 자리잡은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
제2, 제3의 이완용이 자꾸 나오는 이유는 제대로 된 처벌이 없었기 때문이다. 친일파 숭일파 경일파들이 2024년에는 대거로 커밍아웃했다. 권력의 핵심부에도 밀정이 자리 잡고 대놓고 친일 정책을 펼치는 기가 막힌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구 서울역
신 서울역과 구 서울역의 동거
강우규 의사 동상 -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앞에 선하다.” 이는 1920년 11월 29일 강우규 의사가 죽음을 앞두고 대한의 청년들에게 남긴 유언입니다. 강우규 의사는 65살의 고령의 나이에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 남대문역(서울역)에 도착한 사이토마코토 총독을 향해 힘차게 폭탄을 던졌으나 폭탄이 다른 데로 떨어져 거사에 실패하였다. 그래서 서울역앞에 동상이 건립되어 그분의 업적과 넋을 기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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