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거사 베짱이의 무작정 호남 유람기 3편(2017. 1.5. 목) - 영랑생가. 다산초당. 청자박물관. 법성포. 선운사
몸에 익숙하지 않은 침대에서의 잠은 불편하다. 밤새 자다 깨다 했다. 여행에서는 잘 먹고, 자고, 놀아야 되는데 단 한가지 편히 자지 못함이 아쉽지만 그래도 맛난 음식을 대접받으며 먹고, 주변 풍경과 유적지들을 보면서 감탄과 감사를 연발함이 그 불편함을 잊게 해준다.
오늘도 여유롭게 시작하려면 아침을 먹어야지. 어제 밤에 봐둔 콩나물국밥집이 생각나 모두 정리해서 모텔을 나섰다. 강진 읍내는 도시 구조가 옛 도심 길과 새로 생긴 길이 있는데 그 중간에 논과 밭이 있어 마치 다른 동네 같은 느낌이 든다. 밤에 가본 길이라 짐작으로 가서 콩나물국밥(6000원)을 모주 1잔(1500원)과 같이 시켰다. 반찬은 이상하리만큼 짜다. 깍두기는 완전 소금이었다. 국밥을 먹으며 왜 이렇게 음식솜씨가 그럴까를 생각해봐도 난 모르겠다. 하긴 호남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음식 잘 하는 것은 아니지.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다른거지. 여기서 또 하나의 편견을 깨는 아침식사였다.
국밥집을 나와 경찰서 옆에 있는 영랑생가에 갔다. 아침부터 단체관광객들이 많았다. 모두들 사진 찍느라 분주하다. 참으로 대한민국이 부자나라는 맞나 보다. 전문가용 사진기를 들고 다니는 관광객들이 참으로 많다. 생가를 들러보니 영랑은 부잣집 아들이었나 보다. 집도 크고 넓고 별채도 있고 초가집이지만 제법 운치가 있다. 그려~~ 예술은 아무나 하는게 아녀~~, 예술은 아주 천재거나 즉, 또라이 이거나 돈이 아주 많거나 해아 하는 돈 먹는 사업(?)인데 문학은 각 개인의 감수성과 사물을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니 부자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감성을 표현 할 수 있는데, 영랑의 생가를 보니 기본적 풍요가 기반이 되니 다음 단계인 자아표현 단계를 찾고 자아실현으로 갈 수 밖에. 대한민국 부자들이 명예와 부를 이루었으니 알게 모르게 예술품들을 사 모으지 않는가. 예술품은 작지만 현금화 가능하고 시간이 갈수록 희귀해지니 값어치가 더 나가니 말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부자들은 옛부터 예술인들을 지원하며 자신의 부와 지위 및 품위를 유지하며 살았다. 오늘날도 지원하긴 하겠지만 다양한 지원을 기대해 본다. 하긴 예술에 미치면 사업전폐로 갈까? 그래서 장사속으로 예술품들을 사 모으나? 하긴 뇌구조와 생각하는 점이 다르니 그 속을 알 수가 있나?
영랑의 시 중에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란 시를 나도 모르게 읊조리며 마당을 거니는데 커다란 돌에 이 시가 새겨져 있네. 옛 표기법이라 생각하며 읽어야 하지만 어째 운치있고 뭔가가 더 있어 보임은 어쩐 일인고?
자 시를 한번 감상해 보자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5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이 시가 대표적으로 알려져서인지 마당 꽃밭에는 모란이 잔뜩 심어져 있다. 모란 꽃피는 봄에 오면 멋지리라. 연인들끼리는 영화도 한 편 찍을 수 있고...하하하!!!
이제는 다산초당으로 출발. 옛 기억을 살려 이정표를 보며 간다. 넓은 들과 강진만의 갯벌이 풍요로운 강진을 말하는 듯하다. 예전에는 단층 건물로 다산기념관이 있었는데 새롭게 지어놓은 기념관이 있네. 입장료 2000원을 내고 들어가니 다산의 일생과 업적 등이 일목요연하게 정리 전시하여 이해를 높여주네.
다산 정약용은 남인 가문 출신으로, 정조(正祖) 연간에 문신으로 사환(仕宦)했으나, 청년기에 접했던 서학(西學)으로 인해 18년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는 이 유배기간 동안 자신의 학문을 더욱 연마해 일표이서(一表二書: 經世遺表·牧民心書·欽欽新書) 등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이 저술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익(李瀷)의 학통을 이어받아 발전시켰으며, 각종 사회 개혁사상을 제시하여 ‘묵은 나라를 새롭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역사 현상의 전반에 걸쳐 전개된 그의 사상은 조선왕조의 기존 질서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혁명론’이었다기보다는 파탄에 이른 당시의 사회를 개량하여 조선왕조의 질서를 새롭게 강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조선에 왕조적 질서를 확립하고 유교적 사회에서 중시해 오던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념을 구현함으로써 ‘국태민안(國泰民安)’이라는 이상적 상황을 도출해 내고자 하였다.
조선에도 이런 분이 계셨지만 오늘날 우리 현실은 어떠한가? 비슷한가? 온 시민들은 개혁을, 공정한 사회를, 반칙없는 사회를, 상식과 법이 통용되는 나라를 원하지 않는가?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일부 꼴통들의 이익을 위해 정치와 나라가 존재하는 것처럼 시민을 무시하는 짓을 하지 않는가? 어쩌면 남과 북이 하는 짓이 똑 같은가? 우리는 뭔가 달라야 되지 않느냐 말이다. 그래도 우리 한국이 조금 낫지. 시민들의 눈치라도 보면서 나쁜 짓 하니까. 북한의 불쌍한 동포들을 어찌할꼬...??
관람을 끝내고 다산초당으로 슬슬 걸어서 간다. 하~~이 동네도 다산 때문에 먹고 사는 동네임을 주변에서 볼 수 있다. 음식점. 가게, 카페, 민박집 등, 인적도 없는 동네 길을 따라 오르다 초당으로 가는 길로 들어서니 세월에 씻긴 길엔 나무뿌리가 드러난 채로 여기는 자연이요 라고 말하는 듯하다. 흙이 다 씻겨 나가고 바위가 삐뚤빼뚤 튀어나오고 잡목과 삼나무가 어우러진 숲속 길을 걸으니 다산초당의 서암이 먼저 보이고 초당도 보인다. 초당이 원래는 초가지붕이었는데 지금은 기와지붕으로 되어 있어 의아해 할 것이다. 초당하면 아주 소박한 집을 의미하는데 이건 초당이 아니다. 부자집 별장같은 것을 다산이 얻어 써서 그런가? 귀양살이 집치고는 매우 훌륭한 것이다. 옛 귀양살이는 하인도 있질 않던가.
이 곳에서 다산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긴 세월을 살았을까? 비분, 한탄, 포기, 복귀? 숲이 우거져 앞은 보이지 않지만 조금만 동쪽으로 가면 강진만이 내려다 보이는 곳이 나오는데 이 곳에서 답답함을 풀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지금은 이곳에 정자 천일각을 지어 놓아, 올라서 보면 경치가 참 좋고 평화의 마음을 갖게 한다. 비분강개 한탄의 마음을 내려놓고 마음을 추스르고 새로운 다짐도 했을법 하다. 동암 옆으로 동백꽃 핀 산길을 따라 걸으면 백련사로 향한다. 다산 또한 이 길을 걸으며 많은 생각과 그 당시 식자인 스님과 교류를 하며 울분을 삭이고 새로운 각오를 갖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다산의 실학정신이 오늘날에도 꼭 필요하나니 세월이 흘렀어도 하는 짓은 여전히 똑 같은 잘 난 현대한국인에게 아니 대중 앞에 나서고 싶은 자들에게, 대중을 구렁텅이로 몰고가는 정치인들에게 가르침을 주네.
강진은 청자도요지가 아니던가? 청자박물관을 향해 출발. 아니 그런데 읍내에서 찾으니 있나? 대구면에 있는걸.... 왔던 길을 되돌아 또 가고 우여곡절 끝에 가는 길을 찾아 갔다. 가는 길은 옛길이라 꾸불꾸불하지만 해안을 따라가기도 하며 도착.
고려시대나 조선시대나 도공들의 삶은 힘들었으리라. 하긴 인생 자체가 고행길이지만 스스로 행복을 찾고 느끼며 생활하지 않던가. 그러나 고려나 조선은 신분사회라 신분이 주는 속박과 한계 등이 좌절하게 만들고 순응하게 하지 않았을까? 이런 고통을 이겨 낸 자만이 장인이 되어 후대에 그 이름과 정신이 널리 이어지지요.
청자박물관은 입구부터가 다르다. 고려청자를 조형물로 커다랗게 만들어 입구부터 설치해 놓아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는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아니 엄청 비싼 청자를 그것도 아주 커다란 것들을 박물관 경내의 조경물로 설치해 놓으면 혹시 도둑 안 맞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아직까지 그런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안심해도 쓸데없는 걱정 안해도 되는 거지요. 경내에 있는 정자의 지붕 또한 청기와로 만들어 새로운 느낌을 준다. 내부 전시관(입장료 2000원)에는 세기별 청자의 변형모습, 운반 모습, 청자기 파편, 다양한 멋진 청자, 역사 등이 전시 진열되어 이해를 돕고 있다. 여러 전시품 중에 눈에 쏙 들어오는 것은 국화문 찻잔과 참외 주병이다. 국화문 찻잔을 막걸리 잔으로 이용하면 분위기 최고이겠다. 물론 맛도 절로 나겠는데? 전시판매장에서 하나 사야겠다. 다양한 형태의 청자기가 몇 백년이 흘렀는데도 그 멋을 잃지 않고 있으니~~ 대단한 미적 감각을 지닌 도공들이었네. 박물관 주변에는 옛 가마터가 있어 관람할 수 있고, 청자를 만드는 집도 있다.
전에는 판매장이 입구에 있었는데 지금은 앞쪽으로 길 건너 멋진 한옥을 지어 이사갔네. 점심시간이라 문을 닫아서 그냥 밖에서 구경하고 있는데 판매원이 문을 열더니 들어오라고 한다. 생활 청자를 몇 점 사고 싶었는데 잘 되었네. 그러나 값을 보는 순간 입이 떠억~ 벌어지고 동공의 지진이 일어나게 고가임을 확인하는 순간. 아하~ 이래서 상용화가 안되는구나 느꼈다.
지금은 외국 생활 도자기들이 물밀 듯이 수입되지 않는가? 그것도 적절한 값에. 오히려 더 센스있고 현대적인 느낌과 전통이 들어있는 데에 반해 우리 청자는 왜 이리 비싸야만 되는겨? 이유는 있겠지만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정부의 역할이 정말로 필요한 것이다. 양복 입고 넥타이 메며 폼만 잡고 있으라는 정부가 아닌 것이다. 중앙정부든 지방정부든 새로움을 찾아내야 도공도 살고 전통도 살리고 서민들도 품위있게 사용할 수 있지 않느냐 말이다. 단적인 예로, 일본 생활 도자기 그릇이 수입되는데도 한국 것보다 질도 좋고 아름다우며 값이 싼데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전시장 내를 둘러보면서 인간의 능력에 대해 감탄을 하며 막걸리 잔과 밥그릇 국그릇을 사려고 보니 아무리 청자라고 해도 현대적 감각이 떨어짐을 금방 느낄 수 있었다. 막걸리 잔은 맘에 드는게 없어서 사지 않고 생활 밥그릇, 국그릇 두벌을 샀다. 용량이 작아 괜찮다 싶어서이다. 이 생활 청자는 손으로 빚는게 아니라 틀로 찍어내는 것이라 잘 깨진다. 그러나 내 평생 언제 청자기를 써 보겠나 싶어서 그릇에 얽메이지 않는 생활자기를 산 것이다. 밥그릇은 막걸리 잔으로 써도 좋을 듯하다.
강진을 떠나 고창으로 출발. 목포로 향해 가는 길은 넓고 쭉 뻗은 길이라 고속도로가 필요없다. 영암 월출산을 멀리 보며 영산강 하구둑을 건너 목포 시내로 들어서 외곽으로 빠져 국도로 고창을 향해 간다. 점심때가 되어 어디에서 먹을까 생각하며 가다가 기사식당이 좋을 듯해서 길 옆 어디든 눈에 띄면 들어가려 했다. 주차 시설도 되어있는 곳에 가니 한식뷔페로 운영되는 기사식당이다. 그렇지 여기도 경영 때문에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뷔페로 운영함을 짐작할 수 있다. 7000원에 다양한 채소, 고기, 생선 등의 반찬이 있고 벽에는 목포 문화방송의 맛집 탐방 사진이 걸려 있다. 어? 유명한 집인가? 그러나 내가 이 집서 먹은 것 중에서 부추겉절이가 최고였다. 고기는 아예 가져오지 않는다. 갈수록 고기 비린내를 맡기가 싫다. 역시 채소반찬이 좋다. Green field. 옛 기사식당의 맛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고 있네.
점심을 먹고 국도를 따라 꼬불꼬불 길을 따라 선운사로 간다. 무안 함평을 지나 고창으로 가는 길은 농촌이라 한가하다. 호남지방의 옛집들은 거의 일자형 집이 많다. 중북부 지방에 비해 다소 온화하니까 가옥의 구조가 그리 되었으리라. 또 지붕이 예술이다. 용마루 잇는 부분이 하늘을 향해 뻗어 있어 직선의 딱딱함이 아닌 곡선으로 부드러움과 멋을 더해준다. 주변의 밭에는 아직도 배추를 비롯한 여러 채소들이 푸르름을 잃지 않고 겨울을 나고 있는게 남쪽 호남지방의 색다름이다.
선운사를 가기 전에 법성포를 들러서 가가로 했다. 역시 길은 넓고 쭉 뻗어 이동이 편리하다. 굴비가게가 늘어선 옛 포구(지금은 뻘이 쌓여 배가 들어 올 수 없음) 근처에 차를 대고 나란히 나란히를 외치며 줄 맞춰 엮여있는 굴비가게를 가본다. 그런데 크~~윽 이게 뭔 냄새? 아주 역한 냄새, 꼬리한 냄새 등 다양한 냄새가 진동하네. 이 법성포는 굴비 가공과 유통의 중심지. 다양한 조형물도 설치하여 관광객들을 맞이한다. 길을 걷는데 한 가게에서 걸려진 굴비를 사진찍으니 그 집 사원인지가 하는 말이 삼백만원짜리 굴비를 찍어야죠 하며 알려준다. 하하하!!! 삼백만원짜리 굴비라? 요즘은 중국 어선들이 싹쓸이를 하니 조기들이 성장할 틈도 없다고 커다란 조기가 귀하다고 들었지만 이정도 일줄이야... 작은 다리를 건너 새로 조성된 신시가지로 갔다. 그랬더니 어선들이 그쪽에 다 정박해 있는 것이다. 엄청난 양의 그물을 차곡차곡 쌓아 놓고 찢어진 그물을 널어놓고, 다양한 냄새와 지저분하게 보이는 뻘들을 보며 배 사이로 걸어 다녔다.
고창군 무장면을 지나는데 성곽이 보이는 것이다. 고창읍성은 역사시간에 배워 알고 있었는데 무장읍성이라? 가던 길 돌려 성내로 들어갔다. 이 성 역시 다시 복원한듯하다. 성내에는 객사와 동헌, 누각(읍취루)이 남아 황량함과 쓸쓸함을 더해 준다. 이 읍성은 동학혁명군과 관련이 있어 일제 강점기에 다 허물어 버리고 학교와 면사무소를 지어 사용했는데 다 철거하고 복원하는 중이란다. 하여튼 일본놈들은 아무리 세월이 흘렀어도 그 잔악함은 용서 할 수가 없다. 지금 우리가 독립국가로 세계적인 나라가 되었음에도 일본놈들은 사과 한 마디 없지 않은가? 하여튼 독일의 전쟁후 사과와 반성에 비교하면 일본놈들은 여전히 야만인일 수 밖에 없다. 우리의 사촌이고 경제 강국인데도 말이다. 참말로 연구대상이여~~
해가져 어둑한 길을 달려 선운사에 도착. 예전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르다. 주차료(2000원)를 내고 조금이라도 시간 절약하기 위해 일반 주차장이 아닌 유스호스텔 근처 주차장에 주차하고서 걸어서 일주문 근처로 가니 도립공원 입장료(3000원)를 내야한다. 흐리고 어두운 길을 따라 절 입구에 다다라 둘러보니 황량함이 밀려온다. 천왕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니 절의 규모가 예전보다 엄청 커졌음을 직감할 수 있다. 그래도 고색창연한 자태를 지금까지 잘 유지하고 있고 대웅전 뒤의 울창한 동백숲과 경내의 오래된 감나무의 감을 파먹는 새들의 모습은 여전하다. 우선 절에 오면 마음이 편해짐을 느낀다. 마치 내 집같이 느껴짐은 어쩐 연유인가?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는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길 바라고, 그렇지 못하다면 내생엔 스님이 되길 바라는 생각때문인가?
선운사의 창건설화를 보면, 신라의 진흥왕은 왕위를 버린 첫날밤에 좌변굴(左邊窟:진흥굴, 도솔암 밑에 있다.)에서 자다가 꿈속에서 미륵삼존불(彌勒三尊佛)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것을 보고 감동하여 중애사(重愛寺)를 창건하였으니 이것이 이 절의 시초라고 한다. 이 창건설화는 진흥왕이 만년에 왕위를 버리고 출가했다고 하는 사실에 따라 형성되었겠지만, 당시에 이 지역이 신라땅에 속했을까 하는 문제가 있다. 또 검단의 창건설을 보면 위덕왕 24년은 진흥왕이 왕위에서 물러난지 2년 뒤에 해당한다. 그런데 검단과 해구(海口)에 있는 검단리(檢旦里)와 관련된 설화가 있다. 즉, 옛날에 검단선사가 바닷가의 사람들에게 소금 만드는 법을 가르쳤기에 해안 사람들은 선운사에 소금을 시납하였다는 것이다. 두 설은 모두 설화이기에 어느 것이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가장 오래된 조선 후기의 사료에는 모두 진흥왕이 창건하고 그 뒤에 검단선사가 중건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 우리는그렇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되었건 역사 깊은 천년고찰로 천년이라는 무개만으로도 찾아오는 중생들에게 마음의 평화를 주는 것은 사실이다. 도솔산 선운사에 딸린 작은 암자와 절이 50여개에 이르렀다고 하니 고창의 명산이요, 수행의 중심이었음에 틀림없다. 현재는 부속사찰이 4개만 남았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보물과 국보 등이 거의 불교유물이듯이 이 선운사에도 국보급 문화재 들이 많이 있다. 제발 종교가 다르다고 배척하는 대한민국 종교가 아닌 서로 상부상조하는 종교, 사람을 살리는 종교, 성직자들만을 위한 종교가 아니 대중을 살리는 종교, 사람답게 살도록 이끌어 주는 종교를 기대해 본다.
내일은 곰소항으로 소금을 사러가야 되기에 선운사 근처에서 숙박하지 않고 바로 변산 채석강으로 가기로 했다. 밤길이라 깜깜하고 길은 꼬불탕 길이라 운전하기 힘들지만 내일의 시간을 아끼기 위해 출발. 채석강 바닷가 모텔에 숙박(50000원),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식당마다 사람들로 가득. 평일 인데도 관광객들이 많네? 지역주민이 배를 갖고 고기잡아 운영하는 식당으로 들어가 모듬회 2인용 회(80,000원)를 시켰다. 복분자도. 그러나 복분자주는 엉터리. 아주 싸구려 술을 갖다가 파는 것이다. 주인을 불러 이야기를 해줘도 대답만 예~예 하지 전혀 바꿀 생각이 없나 보다. 아이구 1만원 날렸네. 다시 소주를 시켜 회와 밤 분위기와 여행의 넉넉함을 마셨다. 그냥 먹고 마시고 들어가 잠 자면 되는 것이다. 즐겁게 먹고 마신 후 백사장을 걸었다. 이 변산해수욕장도 콘크리트 옹벽을 친 관계로 모래가 쓸려 나가 자갈이 다 드러나 보인다. 캄캄한 밤이지만 파도소리 들으며 약간 얼큰해 걷는 발걸음은 행복이다.
모텔로 돌아와 방에 들어가 바닥에 누으니 아~~ 좋다 소리가 절로 나온다. 오늘은 침대가 아닌 온돌방이다. 바닥은 따끈따끈.
백수거사 베짱이! 오늘도 애썼어요. 당신은 이렇게 인생을 즐길 자격이 넘치니 앞으로도 걱정 말고 즐기세요. 베짱이님!!
안녕~~ 내일 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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