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거사 베짱이의 발길따라 강원도 동해안 여행 - 1편(2017. 2. 20. 월)
대략 목적지는 정했지만 그냥 발길 따라 강원도 동해안을 가기로 하고 9시 20분 집에서 출발. 여행은 카드와 돈만 가져가면 뭐든지 다 해결되니 참으로 편한 세상이로다. 서서울 IC에서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출발. 모처럼 하늘은 맑은 얼굴로 잘 다녀오시라 인사하는 듯하다.
고속도로를 가다보니 오대산 월정사 입구라고 쓴 이정표가 보여 진부에서 빠져나와 월정사로 향했다. 이 절도 오랜만에 가는 곳이라 옛 기억을 되살려 보니 전나무 숲이 우거진 곳이 아주 멋졌었는데... 그곳에서 아이들 어렸을 때 가족사진도 찍고 모처럼 아주 여유로운 마음과 시간을 가졌던 곳으로 기억되는데 지금도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라는 생각도 하면서 갔다.
절에 가기 전에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갔다. 송어회를 먹을까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강원도에 왔으면 산채비빔밥을 먹어야 예의지 하면서 산채비빔밥 집으로 갔다. 길 가의 주변은 상전벽해로 변해 있었다. 옛 집은 거의 사라지고 새로 지은 멋진 집에서 장사도 하고 살림도 하는 부자들이 되어있다. 점심은 간단히 먹고 저녁을 거하게 먹기로 하고 산채비빔밥을 시켰다. 그런데 나물을 보아하니 산채보다는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나물들이 주종을 이루었다. 하긴 산나물을 뜯으려면 그 시간과 인건비가 만만치 안으리니 대량 생산된 나물들로 재료를 삼았으리라. 그래도 집에서 이렇게 해먹으려면 손이 많이 가니, 대신에 이렇게 사 먹는 게 얼마나 경제적인가. 고마울 뿐이다.
<금강교>
절 입장료(문화재 관람료) 1인당 3000원, 주차료 4000원을 내고 절 입구 주차장으로 가니 평일인데도 차들이 많다. 차에서 내려 금강교를 건너 절 입구 천왕문으로 들어가는데, 금강교 밑은 얼음이 얼고 그 위를 눈이 덮어 과연 강원도 추위다운 곳이다. 차가운 바람은 손이 시리도록 차다. 그런데 천왕문 근처가 온통 빙판이다. 눈이 녹아 얼어붙어 빙판을 이룬 것이다. 순간 아니? 절에서 이런 것도 못 치우나? 종무소 직원들 뭐 하는겨? 절집에 오는 손님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다 제거해야 될 거 아녀? 십 몇 년만에 다시 가본 월정사는 많이 변해 있네. 새로운 집들도 들어서고 단청을 새로 입히고... 하여튼 강산이 변했네 그려~~
<천왕문>
월정사를 수호하는 사천왕께 인사 올리고 경내로 가는데 하~~ 이런~~ 완전히 얼음이 얼어 걷기에 무지 불편하네. 조심조심 걸어서 전에 없었던 전각인 금강루 밑을 지나 들어서니 예전에 봤던 익숙한 팔각구층석탑이 보인다. 팔각구층석탑은 연꽃무늬로 치장한 이층 기단과 균등하고 우아한 조형미를 갖춘 탑신 그리고 완벽한 형태의 금동장식으로 장엄한 상륜부 등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뛰어난 석탑이다. 신라의 자장율사가 세웠다고 하나, 고려시대의 석탑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한다. 신라시대의 스님들 출가는 오늘날과 같았을까? 출가는 집안의 영광이었을까 아니면 오늘날과 같이 개인이 풀수 없는 그 어떤 것 때문인가? 궁금하다. 그런데 경내 마당이 온통 얼음과 물 질척거리는 곳이 되어버렸네. 아이구.. 물이 빠지도록 물길을 내지, 그것도 안했냐? 절집에 오는 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잖은가? 이렇게 질척거리고 얼음과 물이 그득한 경내를 알아서 다니라고? 그럴 수밖에. 알아서 다녀야지 뭐 어쩌겄어?
<팔각구층석탑과 적광전>
큰 법당인 적광전에 들어갔다. 보통은 대웅전이라고 현판이 붙어있는데 이곳은 적광전이다. 대체로 적광전에는 비로자나 부처님을 모시는 것이 통례인데 이곳 적광전은 그 통례를 깨고 석굴암의 불상 형태를 그대로 따른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있다. 그러고 보면 모시는 주불에 따라 현판의 이름이 달라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지장보살을 모신 지장전. 관세음보살을 모신 관음전 등등. 난 절에 가면 꼭 절을 하고 온다. 성인 앞에 나를 최소로 낮추는 것이다. 기고만장한 내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지가 세상에서 제일 잘 난줄 알고 착각 속에 살지 않는가? 그런 착각을 잠시라도 떨쳐버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기 위해 나를 낮추는 것이다. 절에 와 부처님께 절을 올리는 사람들은 신라시대나 현대나 마음이 같겠지? 복을 달라고 하면서 절을 하겠지? 아니면 개인의 완성을 위해서? 그런데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만 바뀌었지 살아가는 방식은 모두 같다고 생각한다.
<적광전 뒤 지장전과 여러 전각들>
지장보살을 모신 지장전에도 들러 나를 낮추는 절을 올리고 각 전각들을 둘러보며 월정사 경내를 아무 생각없이 걸었다. 이곳도 현대에 살아남기 위해 템플스테이를 하고, 출가학교를 열어 마음이 빈곤한 중생들을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홍보용 펼침막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려~~, 앞으로는 모든 종교시설들이 텅텅 비는 사태가 올 것이다. 지금도 그렇게 진행이 되고 있고. 옛날처럼 산속에 박혀만 있어서는 포교고 뭐고 어렵지. 대중 속으로 들어와야지 종교의 진정한 뜻을 전해 모두들 평화로운 마음을 갖고 사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시설들을 만드느라 고요했던 옛 맛은 다 사라졌다. 변치않음을 기대하는 것은 나의 욕심이리라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웬지 아쉽다.
<월정사 적광전>
신발과 바지에 흙이 많이 묻어나도 얼음이 얼은 경내를 조심조심 고양이 걸음으로 걸어도 절이 주는 평화는 참 좋다. 예전에 우리 가족사진을 찍었던 아름드리 전나무숲을 그냥 바라보기만 하고 낙상방지를 위해 조심조심 걸으며 나왔다. 아주 조심조심 하면서
<금강루 - 월정사의 금강루는 사천왕문을 지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일주문, 사천왕문, 불이문으로 이어지는 한국사찰의 가람배치에 있어서 월정사는 불이문의 자리에 금강문을 두고 있다. 금강문의 오른쪽에는 움금강역사상이라고도 하는 나라연금강이, 왼쪽에는 훔금강역사상이라고도 불리우는 밀적금강이 있으며 특히 밀적금강역사는 지혜의 무기인 금강저를 들고 부처님을 호위한다>
진고개(1072m)를 넘어 가기로 하고 차를 몰고 갔다. 진고개(泥峴)는 비만 오면 땅이 질어지는 이 고개의 특성이 지명이 되었다. 또 고개가 길어서 긴 고개라 하다가 방언의 구개음화(ㄱ→ㅈ)로 진고개가 되었다고 한다. 다행스럽게도 눈과 얼음이 없어서 운전하기가 수월했다. 좁은 골짜기에 살림집들이 드문드문 있고 비닐하우스들이 햇빛 드는 곳곳에 있는데 이곳에서는 뭘 할까? 표고버섯? 다른 채소들을 키우면 난방비가 많이 들어 채산성이 안 맞을 것 같다. 그런데도 비닐하우스가 골짜기를 따라 제법 여러 군데 설치되어있다. 고개를 내려가는 길은 꼬불꼬불하다. 조심조심 내려오면서 송천약수를 그냥 지나고 소금강 입구 이정표가 보이길레 그 전에 그냥 지나쳤던 곳이라 한번 들어가 보기로 하고 들어섰다. 들어가는 입구는 꼬불꼬불 길이다. 눈 쌓이면 이길은 못 다닐 듯. 한참을 계속 올라가니 막다른 곳이 나오고 더 이상 차 진입이 안된다. 이곳 소금강은 기암들의 모습이 작은 금강산을 보는 듯 하다고 하여 소금강이라 불리는데 이곳 외에도 전국 각지에도 소금강이란 지명이 참 많다. 겨울이라 물이 많지가 않아 황량함을 주지만 여름에 비가 내리면 물이 불어 장관을 이루리라. 그냥 눈으로만 이곳저곳 둘러보고 내려 오다보니 연곡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놓친 등산객이 있어 내 차에 태우고 주문진까지 가는데 이곳저곳에 대한 말씀을 해주시며 향토음식 중에 꾹저구탕 이라는 것이 있으니 나중에 한번 먹어 보라고 한다. 길가의 식당에도 꾹저구탕을 판다고 써 있다.
<아들바위>
주문진 시내로 들어가 수산시장에 들어서니 건어물 가게들이 길가로 즐비하다. 길을 따라 주차할 곳을 찾다가 다니다가 딱히 살 것도 없어 주차하지 않고 해안도로를 따라 가기로 했다. 아들바위공원에 도착하여 내리니 바람이 미친 듯이 부는 것이다. 물론 파도는 하얀 포말을 마구 뿌리며 거세게 몰려오고 부서지곤 하는 것이다. 소돌공원의 아들바위는 일억 오천만년 쥬라기시대에 바다 속에 있다가 지각변동으로 인하여 지상에 솟은 바위로 먼 옛날 노부부가 백일기도 후 아들은 얻은 후로 자식이 없는 부부들이 기도를 하면 소원을 성취한다는 전설이 있어 신혼부부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하긴 부부간에는 자식이라는 매개체가 있어야 더 인간다운 삶을 살 수가 있지. 그러나 현대는 어떤가? 자식이라는 존재 자체가 주는 기쁨보다는 어려움을 먼저 생각하고 계산적이지 않은가? 하긴 제 자식이 거지꼴로 최저 빈민으로 산다는 것을 생각조차 하기 싫어서 그런 것이리라. 이러니 주저하고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아닌가? 또한 현대뿐만 아니라 미래에는 인간이 필요없는 시대가 될 것이니 인간 스스로가 산아제한에 뒤늦게 들어선 것이지. 필요에 의해서. 그런데 정부는 아니 어리석은 애국자들은 무조건 애를 많이 낳는 것이 애국이라며 무지함을 강요하고 있다. 그런 강요를 하는 당신이나 많이 나으쇼 잉~~
이 곳에는 배호의 노래 “파도” 노래비가 있는데 바람이 거세게 불고 거대한 파도를 몰고오니 근접 불가. 생각나는대로 노래를 불러본다.
파도 (이인섭 작사 / 김영종 작곡 / 배호 노래)
1절 : 부딪쳐서 깨어지는 물거품만 남기고 가버린 그 사람을 못 잊어 웁니다
파도는 영원한데 그런 사랑을 맺을 수도 있으련만 밀리는 파도처럼
내 사랑도 부서지고 물거품만 맴을 도네
2절 : 그렇게도 그리운 정 파도 속에 남기고 지울 수 없는 사연 괴로워 웁니다
추억은 영원한데 그런 이별은 없을 수도 있으련만 울고픈 이 순간에
사무치는 괴로움에 파도만이 울고 가네.
몰아치는 파도를 보고 또 봐도 가슴이 뻥 뚫리는 듯 시원함을 안고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니 길가에 바람이 옮겨놓은 모래들이 길을 덮고 부분적으로는 조형물까지도 덮어 버린 곳을 볼 수 있었다. 자연의 힘이 대단하다. 그러다보니 동해안 곳곳 해안가에 설치해놓은 콘크리트 구조물들이 파도와 바람에 의해 부서지고 백사장이 사라지는 곳이 많지 않은가. 자연과 공생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인간의 오만함을 버리고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자연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하조대>
국도를 따라 북상하다가 하조대로 들어갔다. 이곳 역시 전에는 그냥 지나쳤던 곳인데 이번은 들어가 보기로 한 것이다. 바람은 아주 심하게 미친듯이 불고 차갑다. 하조대는 고려말 하륜과 조준이 이곳에 은둔하며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는 혁명을 꾀했고 그것이 이루어져 뒷날 그들의 성을 따서 하조대라 했다는 설과, 하씨 집안 총각과 조씨 집안 두 처녀 사이의 이루어질 수 없는 애절한 사연으로 인해 명명되었다는 설이 있다. 조선 정종 때 정자를 세웠으나 현재는 바위에 새긴 하조대라는 글자만 남아 있으며, 근래에 와서 육각정이 건립되었다고 한다.
예로부터 이곳을 한번 거친 이는 저절로 딴사람이 되고 10년이 지나도 그 얼굴에 산수자연의 기상이 서려 있게 된다고 기록될 정도로 경치가 수려한 지역이다. 말이 필요없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거대한 파도와 미친듯한 바람은 서있기가 힘들게 불어온다. 그러나 이곳의 경치가 주는 감동은 대단하다.
<하조대 경치>
등대도 있어 송림과 하얀 등대가 어울려 한폭의 그림을 만들고 등대는 문 잠겨서 못올라 가지만 그 근처에서 바라본 동해바다는 소나무와 함께 절경을 이루고 있다. 짙푸른 바다와 하얀 포말로 부서지는 파도를 보며 어느 시인이 읊었듯이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차를 몰아 양양 낙산사로 행했다. 길은 넓고 차들은 없고 국도가 완전히 고속도로다. 현지 차들은 아주 쌩쌩 달리고 외지 차들은 그 차들을 따라가고....
낙산사도립공원에 들어서니 오잉~~? 이곳도 상전벽해일세? 예전의 여관을 찾으니 흔적도 없네. 낙산비치호텔앞 주차장으로 가서 보니 호텔도 다시 공사중이네? 2005년 대화재로 낙산사가 화마를 입어 옛 모습을 상상하며 입장료(3000원), 주차료(3000원)를 내고 입장하는데 입구부터가 달라졌다. 그 전에는 나무가 우거진 좁은 길을 따라 걸었는데 지금은 차들이 드나들 수 있는 대로로 변했고 입장권 팔고 받는 곳이 안으로 몇십미터 더 들어가 설치되었네. 아름드리 소나무가 꽉 차고 고요했던 이 곳이 화재로 나무를 다 잃어 버리고 남은 거목들과 새로 심은 소나무들이 자리 잡아 황량함을 준다.
<의상대>
그 아름답던 의상대 주변 소나무들을 그리며 홍련암으로 갔다. 이 길 주변도 다 피해를 입어 옛 경치를 볼 수 없음이 안타까웠다. 전에 나는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해서 홍련암 앞 바다에 뿌려 달라고까지 했던 아름다운 곳이지만 지금은 어느 곳이든 뿌리고 싶은 곳에다 뿌리라고 마음을 고쳐먹고 집 식구들에게 부탁을 했다.
<홍련암>
<보타전>
보타전으로 난 길을 따라 걸으며 해수관음상이 있는 곳으로 올라 나를 낮추며 나를 돌아보는 절을 올리고 바라본 동해 바다는 예나 지금이나 아무 말없이 나를 보고 있었다. 울창했던 송림은 다 사라지고 이제 자리 잡고 커나가는 소나무들 사이의 잡목을 다 베어내 황량하게 느껴졌다.
<칠층석탑과 원통보전>
원통보전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느릿느릿 걸으며 들어서니 화마로 불 타 없어진 법당을 비롯한 담장들을 다 새롭게 복원해 어째 어색했다. 이 원통보전에는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시는 법당인데 이 낙산사는 예로부터 피해를 많이 입었던 절임에 틀림없다.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하고, 고려 때 몽고군의 침략으로 관음상이 훼손되어 이규보등이 다시 관음상을 조성했다고 하고, 한국전쟁당시 피해를 입었는데 많은 대중들의 십시일반으로 다시 재건했는데 2005년 대 산불로 전소된 것을 복원. 참으로 사연 많은 절이로다. 원통보전 앞에 칠층석탑이 세워져 있는데 조선 세조 때 중창불사 시 건립된 것으로 조선시대의 불탑 양식을 알 수 있는 귀한 자료라고 한다. 또한 원통보전을 둘러싼 담장인 원장은 성역임을 나타내고 조선시대 담장의 미가 남아있는 아름다운 담장이다.
<빈일루>
떠오르는 통해의 태양을 맞이한다는 빈일루를 지나 천왕문을 나와 아름다운 홍예문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나섰다. 주변의 나무들이 다 사라진 지금의 홍예문은 그 전만큼의 감동을 주지는 못하지만 앞으로 나무들이 자라 거목이 되면 그 때 온 우리 후손들도 새로운 감동을 받으리라. 이 홍예문은 사찰의 안과 밖을 구별하는 문으로 참으로 아름답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니 나가기 위해 들어 온 후문입구 쪽으로 가면서 옛 기억을 살려 옛 길로 나가보았다. 화마를 이겨낸 몇몇 소나무들이 옛 모습을 상상하게 해 주는 가운데 아쉬움을 두고 나왔다.
어디에서 하룻 밤을 묵을 것인가 의논하다가 동해까지 내려가보자고 하여 국도를 따라 차를 몰았다. 길에는 많은 과속방지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 과속을 할 수가 없다. 고마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어기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난 차를 몰고 여행을 나오면 그 지방 차를 따라 다닌다. 왜? 그 지방 차는 지역을 아주 잘 알기에 뒤만 따라가면 아무 문제가 안 일어난다. 어두워진 강릉을 지나 동해까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정동진 이라는 이정표가 보여 갑자기 방향을 바꿔 정동진에서 묶기로 하고 어두워진 밤길을 달려 정동진 역 근처 풀하우스 모텔에 여장을 풀었다. 4층 방에 들어서니 동해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고 기차역도 보이는 경치가 참 좋은 곳이다.
주인장에게 횟집 안내를 받아 모래시계 공원 입구 근처의 인천활어횟집에서 차가 와 그걸 타고 가 회와 소주를 시켰다. 모듬회(9만원)와 소주를 시켰다. 흔히 횟집에 가면 기본으로 나오는 밑반찬을 '스끼다시'라고 아무 생각없이 모두들 말하는데 이 말은 우리말 '곁들이', '곁들이 안주'로 순화하여 말해야 함을 모르나 보다. 이 뿐만아니라 '접시'를 '사라'라고 하고, '고추냉이'를 '와사비'라고 무심코 말하지. 이는 올바른 우리말을 몰라서 그러리라. 곁들이 안주는 두사람이 먹을 만큼만 얄미울 정도로 나온다. 원래 우리는 풍성하게 차려놓고 먹는 게 미덕이었지만 이제는 음식 쓰레기 문제 때문에 알맞은 상차림을 권장했고 이제는 그것이 정착되어 모두들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은가. 소주가 어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술술 잘도 들어간다. 한잔 들어가니 근심걱정 사라지고 두잔 들어가니 평화로워지고, 석잔 넉잔 들어가니 선계가 따로 없네. 이렇게 좋은 술을 안 마시면 안되지. 음주선경에 들어서니 옛 춘향가에 나오는 시조가 문득 떠 올랐다. 물론 이 분위기와는 안 어울리는 시조지만 그래도 갑자기 생각이 나니 이거이~~ 거시기 하네~~
춘향전에 나오는 이몽룡의 시
금준미주(金樽美酒)는 천인혈(千人血)이요
옥반가효(玉盤佳肴)는 만성고(萬姓膏)라
촉루낙시(燭淚落時)에 민루낙(民淚落)하니,
가성고처(歌聲高處)에 원성고(怨聲高)라.
해석
금 잔의 맛좋은 술은 천 민중의 피요
옥쟁반에 담긴 기름진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촛대에서 떨어지는 촛농은 민중의 눈물이니,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하는 소리 높구나.
그러나 옛 시조 중에 윤선도가 지은 시조인 잔들고 혼자 앉아라는 시조를 읊어보면
잔 들고 혼자 앉아 - 윤선도(尹善道)
잔 들고 혼자 앉아 먼 뫼흘(산을) 바라보니,
그리던 임이 오다(임이 온다 한들) 반가옴이 이러하랴.
말삼(말씀)도 우움(웃음)도 아녀도(아니어도) 못내(언제까지나) 좋아 하노라.
(해석)
슬잔 들고 혼자 앉아 먼 산을 바라다보니,
그리워하던 임이 온다고 하여도 반가움이 이만 하랴.
저 산은 말씀도 없고 웃음도 없어도 나는 끝내 좋아하노라.
참으로 술과 나와 자연이 하나로 된 것이 아름답지 않은가? 술을 마시면 선경에 드는게 어찌보면 자연스럽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보면 그 이유가 욕심이 넘쳐나서 미친 짓을 하지. 그런데 백수거사 베짱이는 은퇴 후의 음주량이 조금씩 늘어나 소주 두병을 거뜬히 마셔버리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로다. 나이도 들어가는데 주량이 늘어나다니? 연구대상이 아닌가? 예로부터 술은 아주 귀한 음식으로 신에게 바치는 신성스런 음식이었다. 그러고보면 지금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모두가 신이로다. 즉, 마시든 안 마시든 인간 모두가 신이다. 그만큼 소중하고 귀한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귀한 만큼 모두를 존중하며 사람답게 살다가 가야한다. 최소한 남에게 피해를 주지말고 있는 듯 없는 듯하며 살아가야 한다. 신과 하나가 되는 음주를 마치고 파도소리를 들으며 숙소로 돌아와 창 밖을 보니 검은 바다 위로 하얀 파도가 포말을 뿌리며 밀려오고 밀려가고 있다. 문을 열면 엄청난 파도소리가 들어오지만 문을 닫으니 고요 선경이로다. 이래서 여행은 즐거워. 오늘도 행복한 하루 탱큐~~!
'여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수거사 베짱이의 중남미 유람기 1편(2017. 12. 5. 화) (0) | 2017.12.27 |
---|---|
백수거사 베짱이의 발길따라 강원도 여행 - 2편(2017. 02. 21. 화) (0) | 2017.02.24 |
백수거사 베짱이의 탐라도 유람기 3편 - 마지막 날(2017. 1. 20. 금) (0) | 2017.01.27 |
백수거사 베짱이의 탐라도 유람기 2 - 둘째날(2017.1.19.목) (0) | 2017.01.24 |
백수거사 베짱이의 탐라도 유람기(2017. 1. 18 - 20) - 첫날 (0) | 2017.0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