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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백수거사 베짱이의 발길따라 강원도 여행 - 2편(2017. 02. 21. 화)

by 베짱이 정신 2017. 2. 24.

백수거사 베짱이의 발길따라 강원도 여행 - 2(2017. 02. 21. )

 

 

  어제 밤의 행복한 음주는 지난 밤의 수면을 무지 편하게 만들었다. 모텔 주인이 알려준 해돋이 시간과는 훨씬 전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부지런한 사람들이 벌써 백사장에 잔뜩 나와 줄을 섰네? 붉은 기운을 담은 해가 솟아 오르려면 아직도 한참을 기다려야 되는데 저렇게 부지런히 나오다니... 난 창에 기대어서 그 광경을 사진에 담았다.

 

 

  잠시 주춤하며 머뭇거리는 사이에 해가 뜨네? 오잉? 부리나케 밖으로 나가 철길 밑으로 난 길을 따라 백사장에 나갔다. 어제와 같이 파도는 거칠게 몰아치고 구름 사이로 해가 붉은 얼굴을 내밀며 감동적으로 떠오른다. ~~ 내 나이 육십이 내일인데 이런 멋진 장관을 몇 번이나 봤던가? 아니 한 번도 보지 못했지 않나? 고교시절 수학여행 때 강릉 경포대에서 해를 본다고 백사장에 나왔다가 해는커녕 아무것도 못보고 돌아선 이후 해돋이를 본 적이 없었고 아무런 감동도 없었는데 그것도 은퇴 후 우연히 동해의 일출을 자연스레 보다니...주변을 둘러보니 소원을 비는 사람, 포옹을 하는 사람 등등 다양한 모습으로 해맞이를 하고 있다. 그래 뭐든지 동기가 중요하지. 이 해맞이를 계기로 모두들 복받고 또 받은만큼보다도 더 복 많이 지으시라. 난 단지 담담한 마음으로 해를 맞으며 아무런 소원도 빌지 않았다. 소원이라면 세계평화와 남북의 평화통일을 기원할뿐??? 사실 난 그것도 빌지 않았다. 아무런 소원도 빌지 않고 그저 떠오르는 태양을 말없이 바라보았을 뿐이다. 거세게 밀려오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시시각각 변해가는 바다 색깔을 보며 조금 더 해와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산 위에 배가 떠 있는 듯한 곳 근처까지 자꾸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짧은 시각마다 변하는 해의 모습을 보며 사진기 셔터를 눌러댄다. 주변의 사람들도 온통 셔터를 눌러대는 소리가 요란하다. 그려요 모두들 멋진 사진 찍으세요.

 

 

  모래시계공원까지 갔다가 그 곳에 설치된 기차로 만든 시간 박물관, 거대한 모래시계 등등을 보면서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조형물과 설치물들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자연인 바람의 힘에 의해 레일 바이크 시설물들 중에 레일은 벌써 무너졌고, 바람에 실려온 모래는 모든 인공시설물들을 덮어 버렸다. 이는 이곳에 맞지 않는 시설을 해 놓았다는 증거가 아니던가? 드라마 한편으로 시골에서 갑자기 관광지가 되어버린 정동진. 이곳 사람들에게 얼마나 경제적 이득을 주었을런지는 모르겠으나 시간을 두고 과학적, 체계적으로 개발을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참으로 많이 드는 정동진의 아침이었다.

 

 

  모텔에 들어가 차가운 몸을 잠시 녹이고 세면을 다 끝내고 오늘도 발길 닿는 대로 가보자. 어제 주인장이 바다부채길이 참 좋으니 꼭 가보라하여 그 길을 가기로 하고 먼저 아침을 먹으러 짐을 챙겨 출발. 모텔 앞마당을 쓰는 주인장에게 고맙다는 작별의 인사를 하고 차를 몰고 나갔다. 곰치국을 먹을까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 주차하기 쉬운 곳을 보니 그곳에 아침을 판다고 하여 들어가니 눈에 번쩍 뜨이는게 황태해장국이네? 볼 것 없이 주문하고 기다려 시원하게 속풀이 하면서 먹었다. 잠시 뒤 어떤 젊은이가 아침 식사로 곰치국 하느냐 물으니 오늘은 안한다고 하네. 아이구 오늘 아침 메뉴 선택을 잘 해서 밥 얻어 먹을 수 있었네. 난 보통 집에서 아침을 먹지 않고 간단한 아로니아 생과 갈은 것을 한 컵으로 대신하는데 여행을 나오니 이거 뭔가를 먹어야하니... 그래도 어제의 음주로 피곤한 간의 해독을 위해 먹은 황태해장국은 일미였다. 그런데 조미료를 뭘로 쓴겨?

 

  바다부채길은 언덕위의 썬크르즈 호탤 근처에 길이 나있는데 나는 심곡항으로 갔다. 바다부채길을 개방한지 얼마 안되어 그 멋진 광경을 보기위해 엄청난 인파가 몰려든다고 모텔 주인장이 말하며 심곡항 쪽으로 가라고 추천을 하여 그곳으로 간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 새벽부터 거세게 몰아치는 파도는 여전히 강하게 밀려오고 가끔 방파제를 넘는 파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충분할 만큼의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니 출입통제를 할 수 밖에. 아쉬움을 달래며 방파제에서 거대한 파도를 피하며 바다부채길의 일부분을 탄성을 지르며 보았다. 부서지는 파도는 어느 시인이 읊었듯이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라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그저 감동이다. 저 바다에 풍덩, 저 파도에 쓸려가고픈 마음이 절로 든다.

 

 

  아쉬움을 진하게 남기고 금진항까지 개설 된 해안도로를 평화로운 마음으로 달렸다. 거대한 파도가 도로까지 덮치기도 했지만 마음은 감동 또 감동 그 자체였다. 꼬불꼬불 해안도로는 동해를 가슴뿐만이 아니라 온 몸으로 받을 수 있는 도로다. 아침햇살을 받으며 달리는 해안도로.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맞으며 달리는 해안도로. 저 바다에 풍덩 빠지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 해안도로. 술 한잔을 하며 종일 앉아있고 싶은 해안도로. 그 길을 왕복하며 가슴 뻥 뜷리는 상쾌함을, 온갖 번뇌를 잊게 하는 시간을 가진 후, 강릉으로 출발.

 

 

  괘방산 등명낙가사 절 옆을 지나게 되어 핸들을 꺾어 절로 들어갔다. 등명낙가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의 자장율사가 북쪽의 고구려와 동쪽의 왜구가 침범하여 변방을 어지럽히는 것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이곳에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고 절을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고 한다. 창건 당시 이름은 수다사(水多寺)였고 신라 말기 병화(兵火)로 소실되어 고려 초기에 중창하여 이름을 등명사(燈明寺)로 개칭하였다. 그 후 조선 중기에 다시 폐사(廢寺)되었다가 1956년 경덕(景德) 스님에 의해 중창되었다. 그 뒤 경덕(景德) 스님은 1977년 영산전(靈山殿)을 건립하였고, 1982년에 주지로 부임한 청우(淸宇) 스님이 범종각, 삼성각, 각종 수련법회를 할 수 있는 대형 요사채, 극락전, 약사전을 건립하였다. 이 절에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7호인 등명사지오층석탑이 있다. 창건과 함께 선덕여왕 때 세워진 것으로 전해지는 이 탑은 은은한 무늬로 조각된 지대석 위에 축조되었는데, 옥개석의 귀퉁이가 조금씩 파손되었고 기단석은 연꽃무늬로 수 놓여 있다. 경사가 급한 해안가에 자리잡은 낙가사 경내를 아무 생각없이 거닐며 푸른 동해를 바라보다 내려왔다. 자장율사가 절을 창건할 때 민초들의 십시일반이었을까, 아니면 귀족들의 시주로 지어졌을까? 이렇게 경사진 곳에 절을 창건한 이유가 뭘까 매우 궁금했다. 그리고 현대화된 건물들도 거대하게 지어놨는데 이곳까지 신도들이 많이 온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경포대로 방향을 잡고 계속 가다가 4차선 도로에서 벗어나 해안도로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바다를 보면서 갔다. 큰 길에서 보지 못했던 작은 동네의 속속을 창 밖으로 보면서 강릉 시내를 빠져나와 경포해수욕장 근처를 드라이브하고 경포호수 근처로 진입 경포대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누각에 올랐다. ~~ 술 생각이 절로 나는 광경이 펼쳐진다. 예나 지금이나 선비나 주객들은 멋진 공경을 보면 술 생각이 나지 않았을까 혼자 생각해 봤다.

 

술을 취게 먹고 두렷이 앉았으니 
억만 시름이 가노라 하직한다 
아해야 잔 가득 부어라 시름 전송하리라 

 이 얼마나 운치있고 멋있는 시조인가. 경포대에 앉아 술을 마시며 세상 번뇌 시름 다 잊고 살고 싶다. 그렇게 되려면 죽어야되나? 하하하~~~!!! 조선시대 시인 정철도 이런 곳에서 시흥이 안 일어 날 수가 없었으리라.

 

  경포대 누각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며 옛 선인들의 모습을 그려보기도 하고 작은 틈으로 경포호수를 바라보기도 하고 이런 저런 호기심 충족을 하고 내려와 선교장으로 출발.

 

 

선교장은 집터가 뱃머리를 연상하게 한다고 하여 선교장이라고 하는데, 전주이씨 이내번(李乃蕃)이 지었다고 한다. 사랑채인 열화당(悅話堂)1815(순조 15)에 오은처사 이후(李厚)가 건립하였고, 정자인 활래정(活來亭)1816(순조 16)에 이근우(李根宇)가 중건하였다고 한다. 안채· 사랑채 · 동별당 · 서별당 · 사당· 정자· 행랑채를 골고루 갖춘 큰집으로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대표적인 한 예이다. 그런데 겉으로 볼 때는 멋있지만 현대인이 살기엔 매우 불편할 것이다. 아무리 조선 상류주택이라고 하지만 현대와는 맞지 않는 유산으로 밖에 안 보인다. 현재의 우리 삶은 조선 어느 임금보다도 잘 먹고, , 입고, 잘 자는 물질의 거대한 행복속에 살고 있지 않은가? 하물며 양반집이면 뭐하랴. 단지 조선시대 상류층들은 저렇게 살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우리가 간접적으로 느끼는 중요 자료이지. 그리고 지친 현대인에게 마음의 평화를 안겨주는 곳으로 역할을 변경한 선교장.

 

 

  이 선교장에서 제일 맘에 드는 곳은 활래정이다. 연못 가에 세워진 정자. 그 정자에 앉아 술잔을 들며 자연의 바람소리 새소리를 들으며 먼 산을 바라보면 정말 행복 할 것 같은 느낌이 절로 든다. 베짱이 다운 생각이로다.

 

조선시대 이정보가 지은 시조가 떠오른다. 

 

꽃 피면 달 생각하고 달 밝으면 술 생각하고,
꽃 피자 달 밝자 술 얻으면 벗 생각하니
언제면 꽃 아래 벗 데리고 완월장취하리오.

 

또한 누가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애주가에 한량임에 틀림없는 무명씨의 시조를 가만히 읊조려 본다.

 

주객이 청탁을 가리랴 다나 쓰나 마구 걸러
잡거니 권하거니 양대로 먹으리라.
취하고 초당 밝은 달에 누웠은들 어떠리.


 

 이 선교장을 둘러 보면서 조선은 신분사회 계급사회라 같은 인간일지라도 천지차이가 나는 생활을 했는데 그 중 양반 상류층 집을 보며 난 하인들의 생활이 어땠을까 매우 궁금했다. 성과 이름도 없이 물건처럼 취급받던 하인들의 생각과 처지를 생각하면서 선교장 일대를 둘러보았다. 양반집을 둘러보면 손님들이 묵는 방이 많이 있는데, 이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것이리라 생각된다. 그러면 오늘날은 어떤가? 고관대작들의 부정부패가 끊이지 않고, 인허가 권력을 가진 자들의 탐욕은 어제 오늘이 아닌자가 오래되었다. 물론 사회가 변했으니 이해는 하지만 최소한의 권력이라도 지닌 자들이 다시한번 조선 양반의 사회적 의무와 책무를 오늘에 되살리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양반집을 구경하면서 이런 쓸데없는 생각도 해 보았다.

 

  선교장 근처가 초당두부집으로 유명한 곳인데 아 글쎄 어느 한 집은 100년 전통집이라고 써 붙였고 어떤 집은 400년 집이라고 써 붙였네? 참으로 기가 막혔다. 그런데 간판을 잘 해석해보니 웃음만 나왔다. 점심으로 순두부 백반을 시켰다. 맑은 순두부 뚝배기 한 그릇을 내오는데 그 맛은 순수했다. 7000원의 점심으로는 그냥 그랬다.

 

 

  마지막 코스로 오죽헌을 갔다. 이는 검은 대나무가 집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서 ‘오죽헌(烏竹軒)’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오죽헌은 겨레의 스승 율곡이이 선생과 겨레의 어머니 신사임당이 태어난 곳으로 율곡(栗谷)이이(李珥, 1536∼1584)가 태어난 몽룡실(夢龍室)이 있는 별당 건물로, 우리나라 주택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이다. 이 집의 역사를 살펴보면 조선 전기의 결혼제도는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으로 남자가 결혼을 하면 부인의 집이나 그 근처에 살고 처가의 재산을 물려받는 풍습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최응현의 집은 그의 사위이자 신사임당의 외조부였던 이사온(李思溫)에게 물려지게 되었다. 이사온과 같이 살던 사위 신명화(申命和)에게는 딸이 다섯 있었는데, 둘째 딸인 신사임당은 덕수이씨 집안의 이원수와 결혼을 하였고, 넷째 딸은 안동권씨 집안의 아들과 결혼을 하였다. 이사온의 집을 물려받은 신명화의 부인 용인이씨는 외손인 이이와 권처균(權處均)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는데, 그 중 오죽헌이 속해 있는 고택은 묘지를 관리하는 조건으로 권처균에게 분재되었다. 이때부터 이 고택의 소유권은 안동권씨 집안의 후손들에게 물려졌다고 한다. 하긴 오늘날 남자들 힘쓰는 시대는 다 가고 여자들 입만 가지고도 휘두를 수 있는 시대가 왔다. 세상은 돌고 도는 것. 다시 모계사회로 회귀한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르겠다. 여인들이 늙어가면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잖은가.

 

  이곳도 참으로 오랜만에 오는 곳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입구부터가 확 달라졌네? 아니면 내가 기억을 못하는 것인가? 입장료 3000원을 내고 들어가니 입술을 시뻘겋게 칠한 여고생들의 화통 삶아 먹은 목소리가 그 넓은 경내를 쩌렁쩌렁 울린다. 거기다가 금상첨화로 쌍시옷의 욕을 자연스레 해대는 입술 시뻘건 여고생들 무리를 보며, 저것들을 그냥 확~~??? 아이구~~... 율곡을 모신 사당을 참배하고 몽룡당, 어제각 등 주변을 둘러보며 고교시절 봤을 때와 무엇이 달라졌나 생각해보니, 어린 시절 내 살던 집들은 조선시대 집들이랑 별 차이가 없어 좁다느니 촌스럽다느니 라는 생각을 못했는데, 현대의 생활에 젖은 현대인의 눈으로 보니 아무리 양반집이라 해도 촌스럽고 초라해 보일 수밖에 없음을 느꼈다. 단, 자연과 어울리며 운치있는 면은 현대주택이 절대 따라 갈 수 없지. 그러나 이 곳에서 위대한 인물이 탄생되었다는 것, 또한 그 집을 영원히 교육자료로 보존하는 것 모두 의미있는 일이로다. 또한 일대를 교육단지로 만들어 시립박물관, 인성교육관 등이 있으니 기대해 본다.

  훌륭한 인물이 나오는 이유중에 하나는 그 집안의 분위기도 한 몫을 하리라. 또한 강릉의 자연이 아름다우니 그런 속에서 훌륭한 스승을 만나고 큰 뜻을 세우며 정진하니 세상에 우뚝 서는 인물이 될 수 밖에 없었으리라. 그리고 그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끝없는 자신과의 싸움을 해 나가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아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리라. 옛말에 "수신제가치국평천하" 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인물이 율곡 이이가 아닌가 한다. 그러면 오죽헌에 와서 무엇을 느끼고 배워가야 되는가? 율곡의 뭣을? 신사임당의 뭣을?

  오죽헌 주변을 여러 박물관 및 교육단지로 만들은 듯 여러 교육 시설들이 자리했다. 그런데 아무리 하드웨어가 잘되어 있어도 그것을 소화하는 소프트웨어가 잘 되어 있고 그를 운영하는 선생들이 깨어 있어야 교육이 잘 이루어지지, 겉만 번드르르한 시스템에서는 백년하청이 될 수 밖에 없음을 걱정하며 오죽헌 관람을 마쳤다.

 

  어제부터 강원도 막걸리를 맛보고 싶었는데 그럴 시간이 없어 맛을 못 봐 무척 서운하여 그냥 집에 가면 후회가 될 것 같아 근처 가게에 가서 막걸리를 찾으니 막걸리를 안 파네. 한 병남은 곤드레 막걸리를 자그만치 5000원에 겨우 샀다. 아니 뭔 막걸 리가 그리도 비싼겨? 이리저리 귀경길에 오르며 가게에 들러 막걸리를 구해봤지만 파는 곳이 없네. ~~ 이러니 양조장에서 막걸리를 생산해도 팔 곳이 없으니 양조장이 하나 둘 문 닫을 수 밖에... 고속도로를 들어와 휴게소에서 물어보니 횡계에 가서 사라고 한다. 직선화를 이룬 영동고속도를 타고 횡계에 가서 어디서 살까하다가 농협 하나로 마트를 보는 순간, !! 저기구나 하고 가서 막걸리를 골고루 8병을 사서 박스에 담아 무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차에 탔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 아닌가? 막걸리 8병을 들고 그리도 행복한 미소를 짓다니? 개가 웃을 일이 아닌가? 하하하.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려 집에 도착. 예전에는 생각도 못한 일들을 은퇴 후 하고 있다. 운전대를 잡으면 졸고 몹시 피곤하여 어쩔 줄 모르던 내가 은퇴 후 이제는 여유를 찾고 사니 다행이로다. 백수거사 베짱이 잘 했다. 베짱이는 영원히 베짱이 노릇 하면서 인생을 즐겨라. 그대는 여유를 누릴 충분한 자격이 넘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