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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백수거사 베짱이의 중남미 유람기 5편(2017. 12. 9. 토) - 쿠바 하바나

by 베짱이 정신 2018. 1. 3.

백수거사 베짱이의 중남미 유람기 5(2017. 12. 9. ) - 쿠바 하바나

 

  어제 밤 우리 방 근처 수영장에서 광란의 파티가 열렸다. 여기도 주 5일 근무에 주말 밤이라 한 참을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떠들고 공연장을 방불하는 광란의 밤이다. 바로 우리 방 5m 전방에서 벌어진 일이다. 12시쯤 비가 내려 모두 들어가나 했더니만 천막속으로 들어가 광란의 밤을 계속 이어간다. 이들이 왜 이렇게까지 하는걸까? 우리는 밤문화가 있어 밤이 더 화려하고 일주일 내내 파티가 아닌가? 하지만 이들은 밤문화가 우리만 못하니 이 날 하루만이라도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 아닐까? 친구와 음악, 술이 함께하는 밤. 모처럼 해방되는 밤. 멕시코에서는 주말 밤의 소음은 다들 용인한다고 한다. 너나 나나 모두 떠들고 먹고 마시니 누구를 탓할까? 우리나라 같았으면 벌써 신고 들어가고 경비가 왔다갔다 하고 했을텐데. 그나저나 아이구 잠은 다 잤네.

 

  아침은 간단한 도시락인데 샌드위치 1/2조각, 조그만 빵 2, 바난 1, 쥬스 1펙으로 간단하지만 충분하다. 우리가 밥에 익숙해져서 잠시 이상할 뿐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정상적일 수도 있다. 공항으로 가는 길은 새벽이라 어둡다. 짐을 붙이고 표를 받고 검색대를 지나는데 그리 심한 검색이 아니다. 쿠바비자와 멕시코 입국시 입국신고서를 제출하며 받은 반쪽짜리 출국용 종이를 여권과 같이 낸다. GateA7, 보딩은 8시인데 이비행기표 역시 불친절하게도 글씨가 매우 작아 마치 숨은 글자 찾아내듯해야 겨우 찾는다. 출국장 근처에 면세점과 일반 가게들이 있어 멕시코의 특성이 담겨있는 마야의 술잔 2개를 9달러씩 18달러에 샀다. 아무것도 안사고 가려다 뭔가 허전해서 고민 끝에 특징적인 모습을 담은 술잔을 샀다. 꼭 술을 따라 마시려고 사는 것은 아니다. 그냥 장식용이다. 아침이라 출국장에는 사람들이 적다. 대형 기념품 가게에서 멕시코 모자도 써보고 사진도 찍으면서 많이 웃었다.

  우리가 가는 곳은 쿠바 독립영웅인 체 게바라, 럼주, 올드카의 나라, 영화 세트장 같은 쿠바를 간다. 지금 쿠바도 변화를 빠르게 겪는데 마지막 낡은 모습들을 볼 수 있는 쿠바를 가는 것이다. 세상은 변하는데 그 변화를 두려워하고 독제권력 유지에만 골몰하고 있는 북한이 떠오르면서 답답한 마음이 더욱 더해졌다. 쿠바도 변하는데... 그러나 이곳 사람들은 매우 낙천적이라 변화에 대한 간절함이 있을까? 그 간절한 힘을 한 곳으로 모을 수 있는 역량이 있을까? 먹고 사는데 아무 지장도 없는데 굳이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변화를 원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인간인지라 밥만 가지고는 살 수 없지 않는가? 그 무엇인가를 찾아 즉,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 개인의 행복, 국제 사회에 대한 호기심과 부에 대한 열망 등을 일정 부분 국가가 권력으로 억제할 수 있겠으나 그 권력을 휘두르던 나라들은 다 망했지. 가랑비에 옷 젓듯이 자유와 풍요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퍼지면서 쿠바도 엄청 큰 변화의 소용돌이가 칠 것이다. , 억누르면 억누를수록 그 반발이 더 세져 통제불능까지 갈 것이다. 다행히도 이 나라는 개인 우상화를 하지 않고 사상통제가 그리 심하지 않았나 보다.

 

  하바나행 비행기는 170석 규모의 비행기로 이륙할 때부터 흔들리더니 마치 꿇어 박히는 것처럼 위태롭게 이륙했다. 칸쿤에서 하바나까지 510Km를 약 50분 비행으로 나라간 이동을 한다. 오늘 날씨가 안좋아서인지 마치 하늘의 비포장 도로를 달리는 듯 매우 흔들리고 롤러코스트를 타는 듯 했다. 무사한 착륙에 승객들이 안도의 함성과 박수를 쳤다. 도착하니 공항에 웬 군복 비슷한 옷을 입은 관리들이 많은지. 그들의 눈초리가 사방으로 열려있다. 세관 근처에 삼성광고판이 있어 사진을 찍으니 세관원이 제지한다. 별것도 아닌걸 가지고 그러네...비가 부슬부슬 내려 쌀쌀해서 긴 옷을 꺼내 입었다. 밖으로 나오니 어느 시골공항에 온 것 같은데 비가 많이 내린다.

 

 

쿠바는 인구가 1200만명에 국토는 남한 면적과 비슷하다나?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는데 비가 조금 오는데도 배수시설이 안되어 있는지 도로에 물이 많이 고인다. 또한 지나다니는 차들은 타임머신을 타고 1960년대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올드카들이 많이 다닌다. 건물 또한 낡고 색이 바래서 우울한 도시 인상을 준다.

 

 

낡아 무너질 것만 같은 세관 건물을 지나 크루즈 대합실 건너 골목으로 들어가 점심을 먹으러 갔다. 옛날 인쇄소 건물 같은 곳에 기계들이 인테리어 소품으로 전시되어 있고 전자 피아노 연주자가 우리 귀에 익숙한 노래를 연주하는 레스토랑이다. 돼지고기와 맥주를 시켰다. 내 귀에 익숙한 노래들이 나오니 참 행복하다. 피아노 연주자와 눈을 맞추며 음악을 들으니 연주자 또한 나를 보며 미소를 짓는다(나만 그렇게 생각 할 수도 있지만). 점심을 먹는 도중에 흑인 여자가수가 나온다. 성량과 감성이 참 뛰어난 가수가 노래를 불러주니 아~~행복하다. 그런데 내가 아는 노래를 부른다. 키싸스 키싸스 키싸스를 부르는게 아닌가? 나도 모르게 얼른 나가 그 가수와 같이 눈을 마주하며 감정을 살려 노래를 불렀다. 그 여가수는 팝송과 체 게바라 송을 부르며 자신의 감성을 맘껏 전해준다. 듣는 귀가 참 호강한다. 노래를 다 부른 후 CD를 들고 다니며 판다. 얼른 10달러 주고 사고 1달러는 팁으로 줬다. 물론 피아노 연주자의 CD도 샀고 팁도 1달러 주고. 예술가들의 삶이란 어디든 어렵고 힘들게 사는 게 비슷할 테지만 내가 행복한 시간을 갖게 해줬으니 참으로 고마울 따름이다. 레스토랑을 나오는데 그 여가수가 나에게 뭐라고 하는데 당신 참 멋쟁이다. 당신과 함께 노래한 순간 참 즐거웠다. 나중에 한번 더 놀러 오시라.  이런 말을 하는 듯 했다. 이렇게 성량 풍부하고 감성 풍부한 가수의 생음악을 같이 노래하고 들어본 지가 하도 오랫만이라서 매우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쿠바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인 말레꼬(방파제)를 지나는데 파도가 정말 대단하다. 카리브해의 파도가 도로를 넘겨 버린다. 날씨가 좋았으면 수영하는 사람들 데이트 하는 청춘남녀들을 쉽게 볼 수 있었을텐데...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니 아무도 없다. 호세 마르띠 광장으로 갔다. 독립영웅 호세 마르띠를 기념하는 혁명광장인데 주변 건물에 체 게바라, 시엔푸에고스의 케리커쳐가 붙여져 있어 쿠바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나보다.

 

 

  광장의 109m의 혁명탑이 우뚝 서있는 바람 부는 광장을 거닐며 혁명당시의 젊은 카스트로, 체 게바라를 비롯한 피끓는 젊은 혁명군들의 높은 이상과 꿈을 상상해보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렇게 혁명을 한 나라들의 대부분은 그들이 부패하여 즉, 초심을 잃어버리고 권력에 심취해 청산의 대상이 된 나라와 인물들이 많은데 이 쿠바만큼은 아직까지 그렇지 않고 모두 강요받지 않은 자발성에 의한 존경의 대상이 된 것은 이들의 순수한 이상과 행동이 국민들 생활과 마음에 세겨져 있다는 것이 아닐까? 또 하나 이상한 것은 도대체 이나라에는 원주민 운동가가 없단 말인가? 백인들만 독립운동을 했다는 말인데... 이 나라의 주인은 바로 원주민인데 그들의 목소리 내지는 흔적이 없단 말이지. 이들은 미개 상태로 살았단 말인가? 그 미개의 기준이 뭐란 말인가? 사실 백인들의 독립운동은 자기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는데 말이다. 그러나 그 중에 깨어있는 사람들이 있어 독립운동을 벌였으니 다행이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대지주 지들 재산을 지키기위한 운동 밖에...그러니 대중의 호응을 못 받았지. 그래도 피델 카스트로나  체 게바라 같은 인물들이 나와서 다행이지.

 

 

  특히 체 게바라는 사회주의 사상을 재구성했다는 것이다. 체는 잘 번역된 많은 글에서 공산주의는 단순히 경제의 재구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오히려 공산주의는 의식 현상이며, 소외를 극복하는 수단으로서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나는 건조한 경제적 사회주의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체는 썼다. “우리는 빈곤에 맞서 투쟁한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소외에 맞서 투쟁한다. 공산주의가 만약 인간의 정신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재화를 분배하는 방법은 되겠지만 결코 혁명적 삶의 방식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정신적 요소들을 무시하고 오직 경제적 요인들만 다룬다면 사람들은 소외를 없애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체와 피델 모두에게 사회주의는 단순히 새로운 분배 방법을 개발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동시에 사람들을 소외에서 벗어나게 하는 문제였다. 이래서 그를 이상주의자라고 하나보다.

 

 

  광장을 다니며 사진을 찍는데 아르헨티나 아줌마 두 명이 사진을 찍길레 내가 먼저 다가가 사진을 찍어 주겠다고 하며 다양한 각도로 찍어줬더니만 아주 고마워 한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더 좋아하는 것이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우리의 국제적 위상이 이만큼 높아졌다는 것일까?

 

  하늘은 잔뜩 흐리고 비가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다. 안그래도 빛 바랜 회색도시처럼 음울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데 참으로 이상야릇한 감정이 든다. 마치 뒷골목에 쓰러져 한없이 비를 맞고 있는 노숙자의 마음이 드는 건 나만의 감성일까? 웬지 모를 답답함과 서러움이 밀려온다.

 

 

  해안도로에는 불어오는 강풍으로 거대한 파도가 도로위로 넘어 오며 젊은이들이 앉아서 노는 장소가 하얀 포말로 덮여버린다. 저 것이 모두 쿠바 젊은이들의 꿈이 실현되는 희망이었으면 좋겠다. 도로 위에는 5~60년대 생산된 차들이 강렬한 원색을 내며 도로 위를 자랑스럽게 달린다. 알고보니 껍데기만 옛것이고 엔진은 중고를 장착하여 달린단다. 내가 물어본 운전사는 도요타 엔진을 달았다고 자랑스레 말한다. 그러나 소음과 매연은 장난이 아니다. 수십년간의 경제봉쇄가 낳은 또 하나의 문화로 쿠바를 대표하는 상품이 되었다는 이 아이러니. 이런 풍경을 보면서 우리도 깨어있는 지도자가 있었다면 어느 한 도시를 올드카 전용 택시 지역으로 만들어 다양한 관광거리도 만들고 새로운 일자리도 만드는 일을 한 번 시도해 볼만하지 않은가 혼자 생각해 봤다. 우리도 자동차 생산 역사가 있지 않는가 말이다.

 

 

  공원 이름이 따로 있지만 흔히 존 레논 공원(John Lennon park)이라 불리는 곳에 갔다. 하바나 북서쪽에 위치한 베다도 거리에 있다. 2000128일 제작된 동상은 혁명과 전쟁으로 멍든 쿠바인들의 마음이 비틀즈의 음악으로 치유되길 바라면서 세워졌다고 했다. 이 조각상은 원래 얼굴에 안경이 씌워져 있었으나 많은 관광객들이 존 레논을 기념하기 위해서 안경을 가져가는 일이 많아, 95세의 할아버지(2014년 당시)께서 그 부분을 안타까이 생각하여 존 레논을 추억하려 쿠바를 방문한 관광객들이 다가가면 노인이 다가와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 얼굴에 올려주었다고 한다. 이 동상 못지않게 이 공원에는 이상하게 생긴 나무들이 많다. 씨앗이 마치 방망이처럼 생긴 것에서부터 바오밥 나무 같은 것들이 밀림이나 판타지 영화에 나오는 그런 장면을 연출한다.

 

 

  주변의 건물 역시 빛 바래고 다 떨어져 나갔지만 예전에 엄청 잘 지어진 집들임에 틀림없다. 다 고풍스러웠고 정글 속 나무같은 가로수와 어울려 쓰러져가는 집안의 영욕을 말해 주는 듯하다. 좁은 공원 길에서 아이들은 야구 캐치볼을 하고 한 낡은 건물에서는 한 아가씨가 사진사와 사진을 찍는데 이 나라는 15세 성년이 되는 날 부모는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평생 기념할 사진을 찍어준단다. 모델처럼 이리 저리 포즈를 취하고 찍는 모습을 보니 색다른 문화지만 우리도 도입하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 우리나라는 결혼 때 작품 사진을 찍지? 그래도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찍은 것이 더 추억이 되지 않을까? 낡고 빈 건물에서 상큼한 처녀가 사진을 찍으니 마치 그 건물 안에서 산초가 시가를 입에 문채 총을 차고 나올 것만 같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대학교 곁을 지나간다. 학교 건물도 예술이다. 도시 전체가 색을 갈아입고 새 단장 하는 날 올드카와 어울린 하바나는 전 세계인이 가보고픈 나라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아니 지금의 이 모습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관광객을 끌어 모으는 것이 아닐런지...

 

  저녁은 현지식으로 630분에 모여 가기로 했다. 쿠바의 환율은 1달러에 0.8쿠바페소로 정부에서 쿠바돈의 가치를 더 높게 책정했다고 한다. 그래서 어디 환전소든지 똑같은 환율이라고 한다. 거리마다 빗물이 넘치니 배수시설이 잘 갖추어지지 않았나보다. 호텔에 들어오니 말이 포텔이지 내부는 시설이 낙후되어 있다. 콘샌트는 헐거워 불꽃이 튀고 욕실 또한 기대수준 이하고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소리는 귀곡산장이다. 또한 새까만 모기들이 커튼에 붙어 있어 잡으려다가 놓쳤다. 아니? 국가에 돈이 없으면 외국 투자라도 받아서 시설개선하고 수익을 올리면 더 좋지 않을까? 국가가 다 해버리는 계획경제의 폐해를 보는 듯 하다. 개인의 창의력과 능력을 발휘해야지 원~~???

 

 

  방이 영 안좋아서 로비로 내려가서 프런트에 방을 바꿔달라고 했더니만 빈방이 없다고만 하더니만 강력하게 말하니 슬그머니 다른 방을 보여주더니 괜찮냐고 물어보길레 훨씬 낫다고 이 방을 쓰겠다고 했다. 우선 소음과 모기가 없으니 괜찮다. 밖은 여전히 바람불고 비가 조금씩 흩뿌린다. 저녁은 La Ferminia Festaurant. 피델 카스트로와 스티븐 스필버그 같은 유명인이 다녀갔고 오래전부터 있던 가구들이 그대로 보존되고 사용되는 역사깊은 식당이다. 이 곳 저 곳을 보며 한 곳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레스토랑을 영업한다는 것 즉, 전통을 살린다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느꼈다. 우리나라도 몇 백년 가는 식당이 나올까? 식단은 점심과 마찬가지로 빵, 채소, 쇠고기, 팥밥, 후식 순이다. 역시 음식이 짜다. 팥은 열을 내려주는 식품으로 더위에 지친 쿠바인들에게는 아주 좋은 식품이리라. 향이 가미되었지만 오히려 풍미를 높여주는 역할을 하니 더 맛있게 느껴진다. 아주 좋아요. 쿠바 맥주 부카네를 한 병 마시고 물 2병을 3달러에 샀다. 아무리 좋은 술이라고 해도 술은 술일뿐이다.

 

 

  쿠바인들의 저녁식사를 체험하고 호텔로 돌아오는 내내 비바람이 몰아친다. 이들도 레스토랑의 불빛을 약하게 해 놓고 밥을 먹는다. 아니 환하면 훨씬 좋지 않은가? 촛불 켜놓고 먹던 그 습관이 있어서 그런가? 하긴 조금 어둡게 백열등을 켜 놓으면 분위기가 더 따뜻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밥을 먹는 것을 일처럼 여기면 식사가 되고 음식의 맛과 분위기를 즐기면서 먹으면 그 자체가 행복이 아닌가? 그러고보면 우리는 먹는 일을 하는 식사를 하는 것이고 저들은 음식의 맛과 가족의 행복을 먹고 마시는 것이 아녀??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망각하고 그저 뭔가 더 높은 것만을 찾아 인생을 허비하는 게 우리가 아닌가 반성해 본다. 이번 여행은 술도 자주 안마시고 참으로 착실하게 다니네. 오늘도 피곤한 몸을 눕히는데 밤새 깨지 말고 잘 자야될텐데... 안녕~~

 

  쿠바의 역사를 잠깐 훌어보면 1492년 콜럼버스가 쿠바를 발견했을 당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라는 탄성을 질렀다고 하는데 스페인은 원주민 의지와는 상관없이 식민지 정책을 도입했고 기원전 3500년경부터 살았던 쿠바 원주민들은 사라져 가고 말았다. 이후 쿠바는 정복자들에 의해 사탕수수와 같은 농작물을 얻을 수 있는 보고이자 남미로 뻗어갈 수 있는 관문으로 전락. 아바나가 북미와 유럽, 남미를 잇는 요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을 탐내는 열강들의 공격이 끊이질 않았다. 식민주위 제국주의가 수백년간 지속되며 패배주의가 고착화되었다. 쿠바에는 호세 마르티 이전에 세스페데스의 10년 전쟁 외에도 여러 차례의 독립 시도가 있었으나 다 실패했다. 호세 마르티는 이전 독립운동의 실패 원인을 분석했는데 실패 원인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자금 부족으로 식량과 무기가 바닥나는 경우. 둘째, 스페인계 백인과 흑인, 혼혈 등의 복잡한 인종 구성 및 빈부 격차 등으로 단결이 이뤄지지 않았다. 셋째, 전쟁의 패턴이 매번 똑같아서 상대가 대응하기 수월했다.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군정을 설치하고 불평등한 조약을 체결하며 쿠바를 식민지로 만들게 된다. 미국 시민권자였던 초대대통령 에스트라다 팔마! 쿠바의 토지, 산업, 자원, 교통의 이권이 미국 자본의 수중으로 넘기게 되고 이어 당선된 1925년 게라도 마차도는 장기독재까지 하게 되어 부의 불평등한 분배와 정치적 부패가 지속되었다. 1953726일 카스트로가 이끄는 156명의 무장청년들이 몬카다 병영을 습격하였으나 미국의 개입으로 실패. 카스트로는 체포되어 법정에서 역사가 나의 무죄를 증명하리라라는 자신의 무죄를 변론하였으니 15년 형을 선고받고 1955년 은사로 석방되었다. 멕시코로 망명 후 체 게바라를 만난 힘을 키운 후 “726일 운동을 결성하고 그란마호를 타고 다시 쿠바로 잠입.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12명만 살아남은 그들은 마에스트라산맥(Sierra Maestra)을 거점으로 쿠바 지하군부대를 조직하여 세력을 키운다. 이 때 반란군 라디오(Radio Rebelde)"라는 해적 라디오 방송을 통해 선전활동을 했다. 점차 쿠바 도시 전체에 지하 무장세력을 구축한 혁명군은 19581230일 체 게바라를 필두로 야과하이 전투에서 중요한 승리를 거둔다. 게리라 전술에 의한 혁명 투쟁을 전개시켜 2년여 만에 바티스타 정권을 전복시킨 카스트로는 정권을 잡고 미국계 기업과 대지주의 토지를 몰수하는 등 획기적인 농지정책을 실시한다. 또한 보건복지정책(무상 치료)은 지금도 쿠바의 자랑거리이다. 쿠바혁명이 성공한지 23개월 반이 지난 1961416일에 그는 쿠바가 사회주의국가임을 선포. 그리고 그는 2016112590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사망하기전 그는 자신의 동상이나 기념비를 세우지 말것이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면 왜? 호세 마르띠가 존경받을까?

19~20세기 초 라틴아메리카 지식인들은 우리의 적은 미국도 유럽도 아닌 우리 자신이라며 자신들의 현실에 절망했다. 차라리 미국과 유럽이 되자고 부르짖을 정도였다. 미국은 범미주의를 내세우며 라틴아메리카를 자신의 영향권 아래 묶어두려 했다. 이때 호세 마르티는 <우리의 아메리카>라는 책을 통해 우리의 아메리카와 우리가 아닌 아메리카를 구분하며 미국과 다른 라틴아메리카의 정체성을 강조. 그가 강조한 우리의 아메리카안에서 모두 다 형제이며 가족인 개별 국가들이 가장 절망했던 문제가 바로 스페인 식민통치에 의해 초래된 혼종’, 즉 여러 인종의 뒤섞임. ‘그런 다양성과 혼종을 극복해 조화롭고 예술적인 영혼의 땅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 ‘인간이란 백인·혼혈·흑인을 초월한 존재이며 쿠바인 또한 백인·혼혈·흑인을 초월한 존재라는 그의 명제 앞에서 인종차별 정책이 들어설 여지는 없었다. 이런 사상을 지닌 호세 마르티는 독립운동가이자 사상가 · 시인 · 대문호로 쿠바를 넘어 라틴아메리카 전체에 영향력을 끼친 인물로 쿠바인의 존경을 받게 된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