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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백수거사 베짱이의 중남이 유람기 9편(2017. 12. 13. 수) - 마추픽추

by 베짱이 정신 2018. 1. 15.

백수거사 베짱이의 중남이 유람기 9(2017. 12. 13. ) - 마추픽추

 

7시 반 기상. 8시 반 식사. 9시 반 출발.

알파카(?)로 만든 담요의 묵직함 속에 목재 바닥의 넓은 방에서 모처럼의 숙면을 취했다. 고지대의 피로가 일반 산소가 풍부한 지역으로 오니 피로가 몰려왔었나보다. 우르밤바의 아침은 지나 다니는 차소리로부터 시작된다. 기분 좋게 일어나 창 밖을 보니 흙벽돌로 지은 집에 스페인 식의 기와, 높은 산 중턱에 걸린 흰구름이 평화를 보여주며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아침식사를 간단히 하고 나와 밖으로 나와 동네구경을 했다. 먼지나는 2차선 도로를 많은 3륜오토바이들이 오가며 서민들을 실어 나른다. 길 건너 가게 앞에 아이를 학교에 보내려 나온 엄마와 딸내미 세명. 이웃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아이들은 신기한 눈초리로 보다가 내가 먼저 웃으며 다가가니 웃으며 대한다. 애들은 세계 어디나 똑 같다. 16인승 스쿨버스에 아이들이 바글바글 탔다. 우리 같으면 정원초과에 뭐에 하면서 난리가 났을텐데 전혀 문제가 안되나 보다. 이 골목 저 골목 다니며 우르밤바의 모습을 눈에 넣었다. 차 위에 기와와 벽돌을 싣고 한 곳에 서서 파는 모습. 출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보니 자외선에 그을려 다 검다. 이들도 몽고반점을 가진 우리와 형제들인데 오랫동안 다른 자연조건에서 살다보니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이다. 밤새 묵은 우르밤바호텔은 작은 규모지만 참으로 아기자기하고 예쁘다. 적은 인원으로 운영하기 알맞은 규모의 호텔로 수익성이 높을 듯 하며 가족단위 운영이 맞을 듯 하다. 이 호텔 주인이 대를 이어 가면서 행복하게 문영하며 잘 살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식들 교육이 제대로 되어야 한다. 자식 교육 잘못하면 한 순간에 망한다.

 

 

                                          (우르밤바 호텔)

잉카의 역사를 살펴보면(출처 : 마추픽추 세계 불가사의 여행, 현암사 편집부) 잉카는 12세기 초 만코 카팍(Manco Capac)의 아들 신치 로카(Sinchi Roca)가 그의 누이동생 마마 쿠라(Mama Cura)를 왕비로 맞으면서 잉카는 신화가 아닌 역사시대로 들어선다. 잉카는 로카왕의 손자 마이타 카팍(Mayta Capac) 시대에 지배 면적이 확대되었고 제9대 파차쿠티 유판키(Pachacuti Yupanqui, 1438~1471) 시대에는 인구가 1100만 명이나 되었다. 16세기 초에는 안데스산맥에서 태평양 해안에 이르기까지 면적이 10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할 정도로 대제국이었고 황제를 정점으로 정치와 사회제도도 비교적 잘 정비되어 있었다. 잉카인들은 읽고 쓰지를 못했다. 그들은 키푸(quipu)’라는 결승문자(結繩文字)를 사용했는데 노끈의 빛깔이나 매듭으로 여러 가지 뜻을 표시했다. 그들은 동물의 힘을 빌리거나 바퀴를 사용하지 않고 도로 · 계곡을 잇는 적교(吊橋) · 농업용수로 · 거대한 성채를 비롯하여 궁전과 신전을 건설했다. 잉카의 의학 · 식물학 지식 수준은 대단했다. 잉카에는 의사계급이 있었고 국가가 고용한 약초 채집자들도 있었다. 잉카 의사들은 절단수술을 했으며 응급상황에서는 심지어 두개골에 구멍을 뚫는 수술도 감행했다. 두개골 수술은 아마 뇌가 부풀어 오르는 치명적인 증상의 처방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대 이집트인들과 마찬가지로 잉카인들은 미라 제작술을 완벽하게 터득하고 있었다.

 

잉카가 왜 망했을까 궁금하지 않나? 1530년대 초 잉카제국에 하얀 얼굴에 수염이 텁수룩한 에스파냐인들이 갑자기 나타났다. 하얀 얼굴의 사람들이 나타나 자신들을 지배할 것이라는 전설을 믿고 있던 잉카인들은 바로 그들이 태고 적 전설의 신들이라고 믿었고 그들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런데 에스파냐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끄는 200명가량의 군사는 잉카인들을 무차별 공격했고 잉카제국을 멸망시켰다.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황금을 찾아 나섰던 사람이었다. 1524년 그는 황금을 찾아 탐험에 나섰지만 실패했다. 1526~1527년 두 번째 탐험에서 그는 잉카에 황금이 무진장 있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파나마로 그냥 돌아갔다. 잉카의 황금이 탐났지만 아직 전투에 임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았던 것이다. 피사로가 1527년 잉카제국을 공격했다면 여지없이 실패했을 것이다. 당시 잉카제국은 제11대 왕 와이나 카팍의 통치 아래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528년 파나마에서 에스파냐로 돌아온 피사로는 잉카의 황금에 대해 에스파냐 왕에게 설명한 후 잉카 정복에 필요한 후원을 요청했다. 그 요청은 받아들여져 피사로는 1532년 페루에 상륙할 수 있었다. 이때 잉카의 사정은 몇 년 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강력한 황제 와이나 카팍이 에콰도르 원정 중에 열병으로 죽은 뒤 그의 장남 와스카르가 제12대 왕으로 즉위했다. 하지만 와이나 카팍과 후궁 사이에서 태어난 아타왈파가 반기를 들었고 제13대 왕이 되었다. 피사로가 잉카를 침입할 당시 아타왈파는 수도 쿠스코 입성을 앞두고 전쟁에서 입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안데스 산속의 카하마르카 온천에 머물고 있었다. 피사로는 잉카제국의 군대와 전투를 벌일 경우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부하들이 훈련이 잘된 용감한 병사들이고 무기와 장비가 충분하다고는 하지만 200여 명의 병력으로 수만의 잉카 정예군을 상대하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피사로에겐 한 가지 계략이 있었다. 어떻게든 아타왈파만 사로잡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잉카로 올 때 피사로는 멕시코 아스텍 왕국을 정복한 코르테스를 만났는데 코르테스가 일단 왕을 사로잡으시오라고 충고했던 것이다. 나라의 존재가 왕의 신권에 달려 있는 남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왕의 명령은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피사로는 꾀를 내어 카하마르카에서 치료하고 있던 아타왈파에게 접근한 다음 아타왈파를 체포해버렸다. 왕이 포로로 잡히자 잉카는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내전을 끝내고 국가를 막 재건하려는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잉카인들은 왕을 살려준다면 7×5×3미터 크기의 방 안에 피사로가 들어 올린 손 높이만큼 보물을 채워주겠다고 피사로에게 약속했고 약속을 이행했다. 보물을 받은 뒤 피사로는 아타왈파를 살려주자고 했지만 부하들은 왕을 살려두면 무사히 귀환할 수 없다고 강력히 반발했다. 그들은 왕을 석방하다면 잉카인들이 곧바로 공격해 올 것은 불 보듯 빤한 일이라며 절묘한 대안을 제시했다. 아타왈파를 살해한 뒤 아타왈파의 동생인 만코 2세를 새 왕으로 옹립해 아타왈파와의 왕권 경쟁에서 패배한 와스카르 일족과 손잡게 하자는 것이었다. 피사로를 이용해 권력을 잡겠다는 야심으로 와스카르 일족은 피사로의 계획에 적극적이었다. 왕으로 추대될 것이라고 통보받은 만코 2세는 피사로를 황금 욕심에 눈먼 약탈자로 여겼고 에스파냐인과의 동맹은 언제든지 파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피사로는 잉카인들보다 한 수 위였다. 피사로는 만코 2세가 황제가 되자마자 그를 감금한 뒤 궁전을 약탈했다. 황제들의 황금 미라를 접수했고 성소에 있던 황금 접시 · 황금 용기 · 황금 신상을 모두 녹여 금덩이로 만들었다.

 

만코 2세는 자유를 찾기 위해 협상을 제의했다. 그는 피사로에게 개 당 200킬로그램이 넘는, 황제들과 황후들의 황금 조상이 성스러운 계곡에 있는데 그 위치는 자신만이 안다고 하면서 자신과 부하 3000명을 풀어주면 그 조상들을 갖고 오겠다고 했다. 이번에는 피사로가 만코 2세의 꾀에 넘어갔다. 만코 2세는 부하들을 데리고 안데스의 협곡으로 들어가 사라져버렸다. 만코 2세는 군대를 정비해 쿠스코 탈환을 위해 공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에스파냐군의 저항은 완강했다. 이 싸움에서 패한 만코 2세는 다시 산속으로 도망갔다. 만코 2세를 추격한 에스파냐군은 만코 2세의 요새를 완전히 파괴했다. 하지만 만코 2세는 다시 도망한 후 새로운 요새이자 새로운 수도인 빌카밤바를 건설했다.

 

만코 2세와 잉카인들은 에스파냐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이며 결사적으로 항전했다. 1541년에는 만코 2세에게 희소식이 날아왔다. 피사로가 살해된 것이다. 피사로에 불만을 품은 반란군이 피사로를 습격해 난도질했다. 반란군 대부분은 붙잡혀 처형되었지만 일부는 만코 2세에게 피신했다. 만코 2세는 그들을 열렬히 환영했다. 반란자들은 잉카 군사에게 에스파냐식 전술을 가르쳤고 만코 2세는 승마와 화승총 쏘는 법을 배웠다.하지만 반란군은 점차 과거의 생활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에스파냐 왕이 아메리카대륙에 총독을 보냈는데 그가 살아남은 피사로 형제 일당과 충돌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잉카인의 틈에 숨어 있던 반란자들은 드디어 돌아갈 기회가 온 것 같았다. 그들은 만코 2세의 목을 갖고 간다면 피사로를 죽인 죄를 용서받고 문명의 땅 쿠스코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들은 만코 2세를 살해하고는 그의 목을 가지고 탈출했지만 쿠스코에 도착한 이는 하나도 없었다. 잉카 병사들에게 쫓기다 모두 살해되었던 것이다. 1544년 만코 2세가 암살된 후 그의 아들 사이리 투파크가 에스파냐와의 항쟁에 나섰다. 때마침 피사로의 동생 곤잘로 피사로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에스파냐왕군에게 패배하는 일이 벌어졌다. 에스파냐는 잉카를 자신들 편으로 만드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했고 에스파냐 총독은 황제 사이리 투파크에게 화해를 제의했다. 투파크는 제의를 받아들였고 빌카밤바를 떠나 리마로 갔다. 에스파냐인들이 세운 페루에 잉카의 황제가 발을 들여놓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투파크는 2년 후에 갑자기 사망했고 아들 티투 쿠시가 황제를 이었으나 11년 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뒤를 이어 만코 2세의 다른 아들 투파크 아마루가 잉카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1572년 페루의 총독 프란시스코 데톨레도는 아마루가 은거하고 있던 빌카밤바를 공격했다. 그러나 그들이 발견한 것은 불에 탄 폐허뿐이었고 잉카인들은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아마루와 그의 마지막 추종자들은 아마존의 깊은 밀림 속으로 도망간 뒤였던 것이다. 그러나 밀고자에 의해 아마루는 사로잡혔고 쇠사슬에 목이 묶인 채 쿠스코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 처형되었다. 잉카제국이 영원히 멸망한 것이다.

 

마추픽추는 페루에서 잉카 문명의 흔적이 가장 완벽하게 남아 있는 세계적인 유적으로 해발 2,300미터의 산 정상에, 험준한 계곡과 가파른 절벽에 기대어 숨어 있는 신비의 공중 도시 마추픽추! 마추픽추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11년 미국의 하이람 빙검이라는 청년에 의해서였는데 그는 아주 높은 산꼭대기에 환상적인 잉카 도시가 있다는 오래된 기록을 보고 찾아 나섰다가 발견. 마추픽추를 발견한 그는 이렇게 외쳤다지요.“! 드디어 금의 도시 비트코스를 찾았다!”비트코스는 잉카 제국이 어마어마하게 보유했던 금은보화가 감추어진 마지막 도시라고 알려진 곳이었고, 빙검은 그곳을 찾았다고 생각했던 것. 오늘날 모두 가상화폐인 비트코인에 열중하는데 그 근원이 여기일 줄이아....예나 지금이나 황금에 눈이 다들 멀어서리...물론 황금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세계는 잉카 제국 멸망 후 340년 동안 버려졌던 황금보다 더 귀하고 값진 잉카 제국의 유적을 만날 수 있게된 것이다. 꼬불꼬불한 산을 돌고 돌아 산 정상에서 만나게 되는 마추픽추는 높이 5미터, 두께 1.8미터의 성벽으로 두텁게 싸여 있는 요새 도시. 잉카 인들은 인구 2만 명이 사는 게 가능했다는 이런 거대 도시를 어떻게 산꼭대기에 정교하게 만들어 놓았을까? 그리고 왜 만들어 놓았을까? 스페인 침략 이후 스페인을 피해 황금을 가지고 건설한 최후의 도시였다는 주장이나 종교적인 목적의 도시였다는 주장 혹은 단순히 잉카 왕족의 여름 피서를 위한 별장이었다는 주장 등 다양한 설이 제기되고 있지만 정확한 진실은 누구도 알 수 없다.

 

                                오얀타이탐보(Ollantaytambo) 전경

                                     (잘 정비된 오얀타이 탐보 골목길)

공중 도시 마추픽추를 향해 출발. 기차역까지는 버스를 타고 가고 기차로 갈아타고 가는 것이다. 길 옆으로는 비옥한 우르밤바의 옥수수밭이 이어지고 멀리 산 중턱에는 염전이 있어 하얗게 표시가 난다. 산 위에 염전이라?... 이 지역은 암염이 있는 지역인데 물이 흘러 암염을 녹여 솟아 올라 염전을 만든 것이란다. 기차는 1110분 출발이다. 아직 시간이 있어 오얀타이탐보(Ollantaytambo)기차역 근처에 잉카시대의 주택 및 동네 구조를 그대로 지닌 동네를 갔다. 여기에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데 오얀타이는 파차쿠텍왕 시대의 장군으로 왕의 딸과 사랑에 빠져 오얀타이탐보로 피신했다. 화가 난 파차쿠텍은 수차례에 걸쳐 오얀타이 장군을 공격했으나 번번이 격퇴되었고 결국 사랑을 인정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곳은 마추픽추로 들어가는 길목인 신성한 계곡의 입구인 동시에 군사적 · 전략적 요충지였다. 오얀타이탐보에는 군인들이 묵었던 숙소 · 종교시설 · 창고와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고 마추픽추와 유사한 형태이다. 바둑판처럼 정리된 골목길과 높은 곳에서 흘러 내려오는 개울물, 돌로 기초를 쌓고 그 위에 집을 짓고 살았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는 동네, 그 옛날 도시계획이 오늘날처럼 똑 같음에 감탄을 할 수 밖에 없다. 옛 집은 집안에서 연통없이 불을 때고 살았기에 천장에는 새까맣게 그을렸고 냄새 또한 재채기 나올만 하다. 이 당시 사람들은 굴뚝을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 많은 연기를 다 맡으며 살았단 말이지. 물론 장단점이 다 있지요. 소독이 되고 벌레들이 못들어 오는 것은 좋았겠지만 사람들이 받는 고통은 심했을텐데 말이다. 굴뚝은 한국인 다운 생각이고 여기는 이곳 형편에 맞게 진화해 왔을테니까.

 

               (실제 거주하는 오얀타이 탐보 마을의주택 내부-꾸이도 같이 공생)

 

기차를 타러 오얀타이탐보(Ollantaytambo)역으로 갔다. 역근처에는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는 작은 식당들과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는 시골역이자 관광열차 시발역이다. 기차시간이 다가오자 어디서 왔는지 기념품 이동 상인들이 다니며 물건을 판다. 그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 나누며(물론 각자의 이야기를 이해하든 말든 각자의 말만 하면서) 서로 웃고 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쿠키를 하나씩 드렸다. 작은 것이지만 정을 나누는 것인데 그분들은 어떤 기분인지 모르겠다. 그 중 한 분에게 쿠스코 관광모자를 4달러 주고 샀다.

 

 

출발 예정 시각이 다가오자 기차가 들어오고 기차표가 A4용지의 반 크기가 되고 내 이름과 차량 호차와 좌석번호가 적혀 있어 내 호차에 탈 때 표를 주고 탄다. 기차는 협궤와 표준궤도의 중간 정도의 크기 열차로 내부가 좁았다. 4명이 서로 마주보고 가는데 가운데 탁자가 있고 그것은 접을 수가 있다. 관광열차라 각 칸마다 2명의 승무원이 탄다. 1시간 40분 가량을 뒤뚱뒤뚱 시속2~30킬로미터 속력으로 달린다. 달리기 선수가 달리는 것처럼 간다. 불편하지만 이곳이 아니면 어디서 이런 기차를 타보랴? 기차 요금에는 음료 서비스 값이 포함되어 있어 간식과 음료수를 준다. 출발 1시간이 못되어 쥬스와 커피, 과자를 준다. 출발부터 서서히 펼쳐지는 풍경은 내가 처음보는 풍경으로 감탄사를 연발하게 한다. 우르밤바 강을 옆에 끼고 달리는 깎아지른 듯한 높은 산과 흰구름, 푸른 하늘, 나무마다 각기 다른 모습을 한 풍경이 덜컹거리는 것마저 낭만스럽게 만든다. 지나는 동안 간이역들이 보이는데 정차하지 않고 그냥 지난다. 단선이라 교차할 수 있는 곳에서는 내려오는 차가 지나갈 때 까지 기다렸다가 간다. 멀리 강건너 숲길을 트레킹하는 사람도 작게 보이고 강 바닥에서 모래를 채취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마추픽추 입구)

마추픽추역에서 내려 뷔페식으로 점심을 먹고 산으로 올라 간다. 이곳 음식 역시 짜다. 산까지 가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걸어서, 또 다른 하나는 버스를 타고 가는 것이다. 씩씩한 젊은이들은 도보로 가는 사람도 있고 내려올 때만 도보로 오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물론 버스를 타고 간다. 버스표는 A4용지에 왕복표로 인쇄되어 있다. 버스표에 도장을 찍고 버스에 24명이 다 차면 출발하는 것이다. 좁고 높은 곳을 오르는 버스는 안전하게 운전하여 데려다 준다. 이에 비하면 백두산 셔틀버스와 비교를 안 할 수 없다. 이곳이 더 품위있고 안전하게 운전한다. 물론 모든 조건이 다르지만 내가 받아들이는 감정과 느낌이 그렇다.

 

 

가이드를 따라 오르니 사진에서나 보던 마추픽추의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화면 속에서만 보던 광경이 내 눈앞에 펼쳐진다. 신비감과 함께 저 노력을 다른 방면에 기울였으면 잉카가 달라졌을 텐데 라는 아쉬움의 탄성이 교차한다.

마추픽추는 잉카인들이 세계를 보는 방식인 상과 하, 우측과 좌측, 남성과 여성, 시간과 공간의 두 기준에 따라 절묘한 위치에 의도적으로 건설되었다. 마추픽추는 와이나픽추(Huayna Picchu)라는 원뿔 모양의 봉우리와 마주보고 있는데 와이나픽추는 잉카인들의 토템으로 신봉하는 두 동물의 형태를 갖고 있다. 와이나픽추 봉우리를 앞에서 보면 퓨마의 형상으로 보이며 좌측에 있는 세 개의 작은 봉우리는 새(콘도르)가 날고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잉카인들에게 와이나픽추는 지상과 천상의 세계를 보여주는 신성한 산으로, 그곳에서 바라보이는 대지에 신성한 도시를 건설한 것이다. 잉카인들은 신성한 도시의 모든 시설들을 어떤 형상을 표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배치했다. 그것은 날개를 활짝 펴고 날고 있는 새의 모습이다. 와이나픽추에서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인간들은 무질서와 방탕에 빠지기 쉬우므로 태양이 다양한 색깔의 깃털을 가진 새를 보내 영혼들을 위무해준다고 한다. 마추픽추는 에스파냐에 정복된 이후 5세기 동안이나 정글 안에 파묻혀 있었음에도 건물들의 지붕을 제외하고는 거의 훼손되지 않았다. 울창한 수림과 뾰족한 봉우리들, 신성한 계곡으로 불리며 우기에는 통과할 수 없을 만큼 지형이 험한 퐁고 보에니케 골짜기가 마추픽추를 외부세계와 격리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전설에 따르면 마추픽추는 태양신의 처녀들, 아크야를 위해 건설한 것이라고 한다. 마추픽추를 건설하는 데 사용된 돌들은 600미터 아래의 깊은 골짜기에서 채취한 것인데 운반도구도 제대로 없었던 잉카인들은 악전고투했을 게 분명하다.

 

 

200개의 건물로 이루어진 유적지의 대부분은 가옥이나 저장고인데 지형의 장점을 최대한 이용했고 화강암으로 건설했다. 출입문은 사다리꼴이고 지붕은 3500미터 이상의 고산지에서만 자라는 이추(Ichu)라는 짚으로 만들어 덮었다.(현재 복원된 건축물의 지붕도 이추로 덮었음) 정방형의 공동 마당을 가운데 두고 열 채씩 무리로 지어진 2층집들은 좁은 도로나 다소 돋운 골목으로 연결되어 있다.

 

                                                     (재단석)

 

고지의 마추픽추에서는 물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잉카인들은 식수와 농사에 필요한 물을 끌어오기 위해 지하수가 나오는 곳에서부터 돌을 이용하여 고랑을 만들었다. 잉카인들의 돌 다루는 뛰어난 솜씨를 엿볼 수 있다.

 

 

공동 마당에는 커다란 맷돌, 부피가 큰 농기구, 연료로 사용하는 라마의 배설물 저장소가 있었고 추뇨(잉카인들의 주식으로 감자 말린 것)’를 만들기 위해 태양과 서리에 번갈아 노출되도록 감자를 널었다. 말린 고기 등은 줄에 매어 집 바깥에 매달았다.종교 건축물은 주 광장 둘레에 축조했다. 정교한 부조가 새겨져 있고 반원형의 탑이 있는 태양신전, 세 개의 창문이 있는 신전, 1신전 그리고 왕의 묘가 그것이다. 왕의 묘는 잉카 최고의 신에게 헌정된 숭배의 장소로 추정하며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다. 잉카인들의 믿음을 표현하는 세 계단이 있는데 이는 지하(죽음) · 지상(현생) · 하늘()을 의미한다. 신전 근처의 왕의 궁전에는 식당과 거실 등이 있으며 마추픽추에서 유일한 화장실이 있다.

 

 (세 창문의 신전 - 잉카의 초대 황제인 만코 카팍이 태어났다고 전해져 가장 유명해진 곳이다)

 

마추픽추에서 눈에 띄는 것은 천문관측을 위해 특별히 고안된 건축물이다. 하나의 거대한 돌을 깎아 만든 인티와타나(Intihuatana, 케추아어로 태양을 끌어들이는 자리)는 해시계와 유사한데 동짓날(남반구에서는 여름) 하루 동안 사제들은 여기에서 제물을 바치며 태양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잉카인들은 태양이 두 개의 의자를 갖고 있다고 믿었다. 북쪽의 주의자와 남쪽의 보조의자가 그것이다. 태양이 남쪽 의자에 자리 잡을 때인 하지가 한 해의 시작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잉카인들은 인티와타나에 이마를 대면 영혼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열린다고 믿었다.

 

                  인티와타나(Intihuatana, 케추아어로 태양을 끌어들이는 자리)

                                       (마추픽추를 닮은 바위)

학자들은 태양신의 후예로 숭배 받은 잉카제국의 아홉 번째 통치자인 세상의 개혁자파차쿠텍이 마추픽추를 건설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하지만 세 개의 창문이 있는 신전을 근거로 만코 카팍이 세운 잉카 최초의 수도라고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만코 카팍이 내가 태어난 곳에 세 개의 창이 있는 석조 벽을 세우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마추픽추의 실체와 관련한 설은 다양하다. 마추픽추가 황금의 도시 빌카밤바이지만 도굴되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종교의식과 천문관측을 위한 종교의 중심지, 아마존과 잉카를 연결한 물류와 교역의 중심지, 잉카왕의 여름 별장이었다는 주장까지 있다. 아마존 상류에 살고 있던 부족과의 대치에서 전략적인 요새의 역할을 했다는 주장도 있다. 마추픽추가 빌카밤바가 아니라면 만코 2세의 보물은 어딘가에 아직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도 페루에서는 빌카밤바를 찾으려는 탐험이 계속되고 있다.

 

                                                  (태양의 신전)

 
사진 해설 :높이 쌓아 올린 태양의 신전 아래에는 삼각형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석실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이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는 아직까지 정확히 증명되지 않았지만 묘석으로 추정되는 돌과 제단, 신전 아래 자리 잡고 있는 형태로 보아 왕실의 미라를 안치했던 능묘인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석실 안쪽 깊숙한 곳에는 미라를 두고 제단에는 왕실의 안위를 위한 제물을 바친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태양의 신전을 지지하고 있는 자연석의 크기가 너무 거대해 이를 옮길 수가 없어 그 모양에 맞추어 능묘를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가 이곳까지 오다니.. 백두산 높이의 마추픽추까지... 500년전 잉카인들이 숨어 살던 곳, 500명의 사람들이 살면서 지혜를 총 동원해 신전을 짓고 농사도 지으며 스페인 군대에 쫓긴 잉카의 왕이 숨어 살았던 곳. 돌로 정교하게 신전을 짓고 집을 짓고 살던 이곳이 엄마의 자궁처럼 지형이 편안한 곳이란다. 이를 보더라도 예나 지금이나 풍수사상은 동서양이 같다. 과학문물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정신적으로 영향을 끼치는데 그 당시야 말해 뭐하랴.. 절대 영향이었을 것이다. 가는 곳마다 사진 포인트가 있어 서로 사진들 찍느라 자리 쟁탈전이 벌어진다. 발을 옮길 때마다 보여지는 광경이 조금씩 달라 감흥도 달라진다. 와~~!! 하는 탄성이 마음속에서 저절로 나온다.

 

하산시간. 내려갈 때도 버스를 타고 간다. 버스표를 보여주고 탄다. 내려갈 때도 조심운전. 저녁도 점심에 먹었던 그 식당에서 먹고 간다. 뷔페식이 아니라 현지인들이 먹는 스타일로 준다. 돼지고기 요리인데 엄청 짜다. 짜서 먹을 수가 없다. 대신 뷔페음식을 가져다 먹었다. 기차는 7시 출발이다. 역앞 기념품 가게 구경을 했다. 다 그만그만한 물건을 놓고 판다. 여기는 은제품이 싸다나? 난 필요없으니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린다.

 

 

밤기차라 창밖이 아무것도 안보인다. 암흑이다. 상하행 기차가 교차하는 곳에서 역무원이 철로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 뛰어가는 모습이 어째 우습기도 했다. 옛 방식대로 운영되는 곳이라 그렇다. 우르밤바 역에 내리니 택시 운전자들이 호객을 한다. 역 앞에는 삼륜오토바이 택시들이 줄지어 섰다. 많은 사람들이 어두운 가로등과 상관없이 잘도 걸어간다. 밤길 두시간을 달려 쿠스코로 올라간다. 쿠스코 시내 호텔에 들어오니 밤 11. 아이고 피곤해라. 고지대(해발 3400m)니 잠이나 잘 자야지. 그런데 벽에 붙은 콘센트가 엉망이네. 뜨거운 물도 안나와 프런트에 말을하니 직원이 올라와 밸브를 연다. 그러니 뜨거운 물이 나오네. 허~~참~~! 피곤하니 어서 잠을 자야지. 수면제인 술 한잔도 안 마시고 잔다. 고지대이니까 조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