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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베짱이의 북유럽, 러시아 유람기 7편(스톡홀름) - 일곱째 날(2016. 8. 8. 월)

by 베짱이 정신 2016. 8. 24.

베짱이의 북유럽, 러시아 유람기 7편(스톡홀름) - 일곱째 날(2016. 8. 8. )

 

모처럼 잠다운 잠을 잤다. 보드카 덕분인가? 아니면 이제 몸이 시차에 적응을 끝낸 것인가? 띵한 머리로 세면을 끝내고 호텔 주변 산책을 했다. 뒤편으로 나가니 강 수준의 냇물이 콸콸 흘러가고 있다. 물이 차가운지 손을 담가보니 차지 않았다. 아침을 먹으러 갔다. 그런데 음식이 간소해도 정말 간소하네. 그럭저럭 먹고 스톡홀름으로 출발. 400km에 달하는 길을 달린다. 양 옆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노르웨이나 동일하다. 바위를 덮은 이끼와 자작나무 그리고 낙엽송, 소나무가 들어찬 숲으로 모든 게 그림을 연상케 한다.

 

스웨덴은 삼림지대가 전국토의 50%, 경작지가 10%, 호수와 하천이 9%, 기타 31% 로서 구성되었으며 스웨덴인은 게르만족의 한 갈래로 다른 인종과의 혼혈 정도가 적으며, 북부 지방의 소수 토착민인 랩족을 제외하면 북게르만어파의 일종인 스웨덴어를 사용한다. 연중 반이 넘는 10월부터 4월 까지가 겨울철로 춥고 눈이 많이 오며, 오후 2시만 되면 날이 어두워지는 흑야현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겨울이 길고 춥고 어둡다 보니 우울증에 많이 걸리고 술을 많이 마시게 되어 커다란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고 한다. 그려 세상사 이치가 하나가 좋으면 하는 반드시 나쁘게 되어있지. 이 나라도 예외일 수가 없지요. 18세 이상의 자녀는 독립하여 분가하기 때문에 두 부부만이 살게 되고, 부부간에 정이 없으면 나이 먹어서도 이혼을 많이 하게 된다고 한단다. 18세 이상 의 분가한 자녀들도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 동거를 많이 하며 그래야 부모도 안심할 수 있고 간섭을 안 한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 생겨나는데 이 나라는 일찌감치부터 새로운 가족형태를 만들어 왔네그려.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까?

 

빙하기가 끝나가던 기원전 11000년경부터 인류가 유입되어 정착하기 시작하였는데 96,000개의 호수와 24,000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다. 스웨덴의 관문인 스톡홀름은 발틱해와 마라렌(Malaren) 호수가 만나는 곳에 14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장 아름다운 수도 중의 하나로 물위에 세워진 매혹적인 도시로 북유럽의 베네치아라고 불리며 인공과 아름다운 자연이 조화를 이룬 곳이다. 우리나라와의 시차는 7시간이다. 스웨덴은 한반도의 2.4배이며, 인구 약 1000만명이다. 또한 가수 ABBA의 나라로 ABBA 박물관이 있다는 나라로 스웨덴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바이킹의 활동이 활발했던 9세기경인데 그 후 11세기에 이르러 그리스도교가 정착되면서 독립국가를 이루었다. 스톡홀름의 창시자 비르예르 얄(Birger Jarl, 재위 1250~1266) 왕이 법률을 정비하면서 중앙집권 형태의 왕국을 탄생시켰다

 

스웨덴은 한때 스칸디나비아의 강국이 되면서 핀란드와 노르웨이를 지배하기도 하였다. 이 세 나라의 국기에 다 같이 십자가가 들어 있다. 노르딕 국가. 스웨덴은 사회보장제도가 잘 운영되는 나라로, 담세율이 평균 40%이며 고소득자의 경우 90%까지 세금을 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담세율이 높은 반면 의료보험제도가 발달하여 전 국민이 병원이 무료이며,

대학까지 무료이고 어린아이들도 1명의 경우 월14만원 2명의 경우 월 30만원의 용돈이 나오는 등 자녀가 많을수록 많이 지원하는 등 사회복지제도가 발달했다고 한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라는 말을 학창시절 배우지 않았던가? 젊어서 열심히 일하고 세금을 많이 낸 다음 노년을 비교적 여유롭게 보내는 것이다. 스웨덴처럼 보장만 된다면 우리나라도 못할 이유가 없다. 이게 모든 사람의 꿈이 아니냐?

 

스웨덴은 노벨상 수여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 하며 세계적인 스타 배우와 작가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잉글리드 버그만그레타 가르보’, ‘말괄량이 삐삐로 잘 알려진 동화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닐스의 이상한 여행의 작가 셀마 라게를뇌프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어이 이름도 어렵네. 자연 환경이 좋으니 상상력도 뛰어난가?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살아가자니 발전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스톡홀름으로 가는 길에는 제법 농토가 있다. 수확을 기다리는 밀밭이랑 수확을 끝낸 빈 농토가 하늘과 어울려 깔끔하고 평화로운 풍경을 보인다. 농토가 제법 있는 스웨덴은 그래도 살기가 낳은 듯 하다. 그러니 노르웨이의 배가 되는 인구가 몰려 살지.

 

7시 반에 출발하여 1시에 도착. 오랜 시간 걸려 스톡홀름에 도착. 이곳 역시 산과 호수, 바다. 그리고 요트가 많네. 오는 동안 두 번의 휴식시간에 숲속을 들어가 봤는데 역시 두꺼운 이끼가 바위를 덮고 바위가 아닌 곳을 밟으면 푹푹 들어가 물이 쭉쭉 올라온다.

 

점심을 먹는데 이곳 한식당은 현지인들이 많이 찾은 곳이란다. 먹는 모습을 보니 비빔밥 등의 채식 메뉴를 많이 먹더군. 우리는 김치찌개와 함께 먹는데 밑반찬은 별거 아니다. 숙주나물을 다 먹어 내가 반찬을 더 가지러 갔다가 미역 초무침이 있어 담아서 가져오려고 했더니만 추가 반찬은 10유로를 내야한단다. 그래서 주인에게 다시 덜어 놓을까 물었더니 그냥 가져 가라고 해서 가져와 일행들과 먹었지만 기분은 좀 그랬다. 어쩔 수 없지. 여기는 한국이 아니니까.

 

점심을 먹고 스톡홀름 시청사로 출발. 뭐 대단한 시청사이기에 돈을 받고 입장시킬까? 라는 생각이 들으며 반발심이 생기기도 했다. 내 생각으로는 시설물이든 뭐든 간에 작은 의미라도 부여하고 이슈화 시키면 되는 것이리라. 이 청사 그러지 않을까? 혼자 생각해봤다.

 

 

스톡홀름 시청사는 랑나르 웨스트베리 라는 사람이 설계한 것으로 1911년에서 시작하여 1923년 완공되었고, 우아하며 위로 갈수록 완만하게 좁아지는 106미터 높이의 탑에서는 멋진 시내 조망이 가능하다. 이 건물에는 특이하게 노동자의 흉상이 문 위에 있는데 이는 이 청사를 짓는데 동원된 노동자의 상이랍니다. 이들의 높은 평등의식은 사회민주주의에서 찾아야 하나? 외관에는 붉은 벽돌을 사용하였다. 시청사 내부로 들어가면 블루홀이 나오는데 처음에 푸른색으로 지어질 예정이었으나 븕은 색 벽돌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음영 효과에 다소 어울리지 않아 바뀌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블루홀이라고 불리고 있는 이유는 처음 설계될 때의 모든 설계도와 초안이 매우 유명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시청사의 가장 큰 행사장으로 매년 1210일에 노벨상 수상식이 거행되는 장소입니다.

 

북유럽에서 가장 큰 만 여 개의 파이프를 갖고 있는 오르간의 파이프는 천장 밑에 있는 나무 장식 속에 들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이 파이프 오르간은 노벨 시상식후 만찬 때와 1231일 일 년에 단 두 번 스웨덴 연주자 두 분이 번갈아 연주한고 한다.

 

 

시 의회는 매 격주 월요일 저녁마다 회의가 이루어지는데 일반 방청석에는 약 200명 정도가 들어와 회의를 구경할 수 있고 시의원은 자전거를 타고 회의에 참석한다고 한다. 그야말로 봉사 명예직이지요. 우리나라처럼 벼슬아치가 아니다. 우리나라도 지방의회 의원들을 봉사 명에직으로 만들어 놨더니만 정치권에서 벼슬아치로 만들어 버렸지요. 비서에 유급제로. 이것들이 지방토호가 되어 조선시대 못된 짓을 현대화하여 합법적으로 도적질을 하는 것들이 많찮습니까? 이게 압축 성장의 폐해가 아닐까? 하긴 이 나라도 온갖 시행 착오를 하고서야 정립 되었을텐데 처음에는 시의원이 100명이었는데 어떤 의사 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짝수보다는 홀수가 결정에 유리하다 하여 지금은 101명으로 열심히 봉사(시간수당만 지급)한다고 한다. 위 천정의 기하학적 무늬가 바로 100명의 시의원을 상징하는 거라고 한다.

 

시민들의 결혼식장으로 쓰는 원형방. 이 방에서 결혼 할 수 있는 사람은 신랑 신부 둘 중에 하나라도 스톡홀름 시민이면 오케이 매주 토요일 36쌍의 결혼식이 열리는데 신청 후 6개월을 기다려야 된다나? 그렇지만 결혼식 시간은 달랑 5분이면 끝.

 

시청사 2층 황금의 방(노벨상 시상 때 무도회장으로 사용되는 홀)에 들어서니 벽면이 모두 금박의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어 마치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듯한 환상적인 분위기를 주는데, 모두 1,900만개의 금박 모자이크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 방의 한 면에 호수의 여왕모자이크가 있는데 이는 스톨홀름 창조와 관련된 신화를 바탕으로 한 모자이크 벽화라고 한다. 이 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우월감을 주려고, 아니면 위로하려고? 다른 세계에 와 있는 착각을 일으키게 했나? 궁금하네~~..

 

프레스코 양식의 왕자의 회랑(왕자가 직접 그림을 그렸다나?)에 그림을 그린 이유는 만찬장에서 창을 등지고 앉은 사람은 창 밖의 풍경을 볼 수 없으므로 창 밖의 풍경을 벽에다 그려놓아 마치 밖을 내다보는 기분으로 만찬을 즐길 수 있게 했다고 한다. 참 가상한 생각이로다. 이게 바로 배려 아닌가?

이렇게 시청사 내부의 모든 부분에 의미를 두고 중요시 하니 자연스레 고귀해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러니 입장료도 받고 그러지. 밖으로 나오면 호수와 맞닿은 정원은 참으로 평화로운 곳이다. 많은 사람들이 벤치에 앉아 졸기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고, 관광객들은 열심히 사진을 찍어대고 열심히 포인트를 찾아다닌다. 호수 건너편의 풍경은 정말 멋지다. 호수와 다리 그리고 각종 선박들의 왕래가 있는 아주 술 부르는 장소다.

  

잠시 5분을 차를 타고 왕궁과 대광장으로 출발. 왕궁은 1523년 구스타프 바사왕이 최소 건립한 후 1697년 화재로 전소되었다가 1754년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고 한다. 이탈리아 바로크 양식과 프랑스의 로코코 양식을 도입한 건물로 1982년까지 스웨덴의 왕궁으로 사용 되었으나, 왕실이 스톡홀름에서 배로 40분 거리에 있는 드로트닝홀룸 궁전으로 옮김에 따라 현재는 국왕의 집무실과 외교사절의 숙소와 만찬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현 국왕이 집무하는 있는 왕궁의 일부는 관광객에 개방되고 있다.

 

 

왕궁 앞 광장에는 여러 대포가 진열되어 있고, 수비병들이 초소에 서 있는데 가만히 보니 여군도 있었다. 군입대 경쟁이 아주 심하다고 한다. 혜택도 있고 폼나기 때문이라나?

 

왕궁 옆에 오벨리스크가 있는데 높이 22m,1788~1790년까지 러시아와 전쟁중 국민들이 스웨덴을 잘 지켜 주었음에 감사하여 구스타프 3세가 세운 탑이라고 한다. 근처에 대성당이 있는데, 스톡홀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로, 국왕과 여왕의 대관식, 결혼식이 치러지는 장소이다. 여기도 성당을 들어가는 입장료가 있다.

 

 

교회를 지나 골목길로 들어서 조금만 가면 구 시가지 감라스탄( Gamla Stan ) 중심에 위치한 대광장이 나오는데 노벨 박물관도 있다. 대광장은 "스토르토르에트"라고 하는데 토리에는(광장)이란 뜻이며 "스토르"(크다) 의 뜻으로 지금은 관광객들, 카페, 레스토랑, 기념품점으로 북적대지만 1520년 스톡홀름 대학살이 일어난 곳이다. "피의 광장"이라고도 부르는 대광장은 덴마크 왕인 크리스티안 2세가 덴마크 주도로 결성된 스칸디나비아 3국 칼마르 동맹을 탈퇴하고자 하는 국민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1520118~9, 이틀에 걸쳐 80 여명이 넘는 스웨덴 귀족들을 목잘라 죽이면서 그 머리를 광장 중앙 한 곳에 묻었는데, 바로 '해골의 샘'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광장의 우물이 서 있는 자리다. 대광장 가운데 위치한 분수대의 붉은 부분은 그때의 한서린 피의 자욱들이라나? 믿거나 말거나...그런데 대광장이라는 명칭이 어울리지 않은 좁은 장소에 불과하다. 그러나 크기보다 감라스탄의 중심지라는 의미로 그 중요성에 의해 대광장으로 불리우나 보다.

 

 

주변을 둘러보고 기념품 가게도 들어갔는데 이곳의 유명품으로 행주라나? 아니 뭔 행주가 금행주인가? 유명하게. 자작나무로 만든 천연이라나? 가이드가 데려간 곳은 조금 비싸다. 한국인으로 바글바글. 나는 눈으로 구경만 하고 주변 골목을 다녀보고 독일인 교회도 들어갔는데 출입구를 닫아서 못 들어 갔다. 아름다운 골목과 넘치는 관광객들을 구경하며 이곳 저곳을 다니다 동남아인이 운영하는 선물센터에서 행주 3장과 냉장고 자석 두 개를 샀다. 가이드가 추천한 가게보다 훨씬 싸게 산 것이다.

 

 

스톡홀름의 마지막 코스인 바사박물관에 도착한다. 스톡홀름의 유르고덴 섬에 있는 바사박물관은 바사(VASA)호라는 배를 전시하고 있는 곳이다.

바사호 박물관-구스타프 2세 시대인 1625년에 건조되어 1628810일 처녀 항해 때 스톡홀름항에서 침몰한 스웨덴 왕실의 전함 바사호가 전시된 곳으로 침몰된 이후 1956년에 해양 고고학자인 안데스 프란첸(Anders Franzen)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발견후 333년만인 1961년에 인양되어 1962년 임시 박물관이 문을 열어 이곳에서 1979년까지 보호액을 뿌리는 작업이 계속되었답니다. 총길이 69m, 최대폭 약 11.7m, 높이 52.2m, 배수량 약 1,210, 적재 대포 64, 탑승 가능인원은 450(300명의 군인). 바사호의 인양과 함께 당시의 목조품과 배안의 조각상등과 더불어, 당시 선원들의 유골과 유품들이 함께 발견되어 17세기의 사회상을 잘 반영해 주고 있으며 박물관은 총 7층으로 구성되어져 있어, 바사호를 여러각도에서 바라 볼 수 있습니다. 이 배가 겨우 1300m 정도 항해하다가 수심 330m의 깊은 바다 속으로 침몰한 전함으로 당시 스웨덴은 북유럽 발트해 주변 제국 건설에 분주해 막강한 해군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전함 건설에 총력을 기울였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는 짓은 똑같다. 지금 중국과 기타 여러 나라를 보라 해군력 증강에 열을 올리고 있지 않은가. 스웨덴 왕가의 자존심과 국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만든 목재전함이 왜 침몰했는지에 대해 그 이유는 정확히 모른다고 한다.

다만 몇 가지 가설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하는데 그중에 출항당시 국왕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많은 선원들이 한쪽으로 모여 배가 기우러졌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애초의 계획보다 더 많은 수의 포를 싣고자 했던 것이 침몰의 원인으로, 상부 하중이 너무 커져 균형을 잡지 못하고 돌풍에 침몰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해석은 분분.

 

참으로 인간의 능력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 무한대가 아닌가? 깊은 바다속에 잠긴 난파선을 한 조각 한 조각 뜯어다 다시 처리하여 조립하여 전시하고 이것을 통해 교훈을 얻고 있지 않은가? 이 바다는 염도가 낮아서 배가 그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상태가 양호하게 잠자고 있었다고 한다.

 

바사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면 맞은편에 궁전같은 건물이 웅장하게 서 있는데 그것은 스웨덴의 북방 민족 박물관이다.

1907년에 개장되었으며 스웨덴의 문화와 풍속을 보여주는 생활용품 등이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그냥 눈으로 외관만 구경하고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으로 가기 위해 부두로 간다.

 

부두에는 배를 타기 위한 단체 관광객들을 실은 버스들이 도착하고 우리랑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온 한국 관광객들을 또 만난다. 부두 대합 실에서 기다리다가 앞에 앉아있는 청년에게 말을 건내 대화를 시도했다. 이 청년은 독일 청년으로 여자 틴구와 휴가를 즐기러 다니는 중이란다. 이 청년은 한국 천안에서도 일하고 안양 관악산도 하이킹 했다고 한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배를 탈 시간이 되어 헤어졌다.

 

우리는 핀란드 헬싱키로 가기 위해 밤새 배를 타고 가는 것이다. 이 배의 저녁 식사에는 음료, 포도주 등이 무한 제공되니 마음껏 먹고 마시라고 한다. 다 배운임에 포함이 되어있다. 저녁은 약 5만원 짜리 뷔페고 아침은 조금 싸다. 배를 타고 우리의 선실로 가니 이번에는 높은 층이다. 이 배 또한 면세점 등 편의 시설이 다 있다. 그러나 이 배의 항해 거리가 짧기 때문에 내일 아침 7시하선이 매우 바쁠 것이다.

 

짐을 정리하고 내일 입을 옷을 꺼내놓고 배를 구경하다가 정해진 시간이 되어 저녁을 먹으러 갔다. 으아~~ 사람들로 바글바글. 도대체 음식을 뜰 수가 없다. 음식은 여러 가지로 내가 좋아하는 연어와 청어절임 등이 다양하게 있다. 게다가 포도주가 무한제공이니 마치 맥주를 따르듯이 따라서 여러 잔을 마셨다. 맛이 좋았다. 우리 좌석 옆에는 가족끼리 휴가 가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마치 영화 속에서 본 것 같은 사람이라 내가 영화배우 아니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하는데 그 사람 얼굴을 보니 기분은 매우 좋은 가 보다. 하긴 칭찬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아이들이 매우 귀엽기도 하고 해서 집사람이 예뻐하며 칭찬도 해주는데 매우 쑥스러워 하네. 아주 즐겁고 흥겹게 포도주를 맘껏 마시며 저녁을 먹었다. 좋아진 기분으로 배안과 갑판 위를 산책한 후 선실로 돌아왔다. 한 잔 더 하면 좋으련만 이제는 몸이 알아서 스스로 금지 명령을 내린다. 내일을 기약하며 굿 나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