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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2002년 산동반도유람기

by 베짱이 정신 2013. 1. 28.

 

2002년 산동반도유람기

 

2002년 8월 5일

바람이 거세게 분다. 11시까지 제2국제여객터미널 까지 가야하는데 폭풍주의보까지 내렸으니 어쩔꼬? 궁금해서 여행사에 문의를 했더니만 예정대로 출발한다고 걱정말고 나오란다. 기본 상식으로는 못 뜰텐데... 큰 배라서 괜찮을 수도 있으니 가 봐야지 뭐. 아이들과 같이 가려다 아이들 둘만 남겨두고 부부만 가려니 어쩐지 마음이 안되어 찜찜했지만, 그동안 사느냐 못했던 둘만의 여행이라 한편으론 기대도 되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국제여객선을 타고 서해바다를 건너 중국 산동반도를 찾아간다니 야릇한 흥분감도 올라왔다.

 

여객선 이름은 뉴 골든 브릿지 1호로 16000톤급으로 인천과 청도를 왕래하는 여객선이다.

말로만 듣던 보따리 상인들이 보였는데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12시 경에 수속을 완료하고 배를 타러 나갔다. 처음으로 인천항 독에 들어가 본 것이다. 선실은 1등실로 4인이 함께 쓰는데 바다가 보이지 않아 답답했다. 바다가 보이는 곳은 특실로 2인실이었다. 훨씬 좋았다. 그래서 안내데스크에 가서 바꾸는데 얼마나 드느냐 물었더니 1인당 3만원씩 더 내라는 것이다. 잠깐 생각해 보니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큰 바다로 나가면 물밖에 안보일텐데 또한 밤이 올텐데... 그리 생각하니 그냥 있기로 했다.

 

인천항을 빠져 나가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말로만 듣던 독의 운영 모습을 실제로 볼 수 있었다.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배 안에는 여러 편의 시설들이 있었는데 호텔을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1시 20분 경에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동태찌개였는데 두부도 맛이 갔고 동태도 곰팡내가 났다. 그 값이 5000원! 값어치도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배에서 먹는 밥은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술도 곁들여 먹으면 좋으련만 배 안에서는 참기로 했다. 바람이 많이 부니 멀미를 생각해야지. 밥을 먹고 나서 밖에 나가 산책을 하면서 풍경을 감상했다. 싸롱(沙龍)에 가서(즉 배 안의 매점) 칡차(1500원)와 과자(600원)를 사서 놓고 밖의 섬경치도 구경하면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팔미도 앞을 지나 먼 바다로 나갈수록 그 큰 배가 좌우로 흔들림을 몸으로 많이 느꼈지만 그런대로 참을만 했다.

 

선내 면세점에서 북경 동인당에서 만든 십전대보주를 6달러에 샀다. 인천북성동 중국식당에 가서 사려면 만원을 주어야 했는데 여기선 7200원 정도였다. 같은 선실을 쓰는 분들이 점잖으시면서도 어딘가 기품이 있어 보이는 초로에 접어든 분들이었는데 아무리 봐도 선생님들 같았다. 첫날은 그냥 탐색전으로 인사만 하고 보냈다. 그런데 이 두분은 소주를 주머니 마다 가지고 다니면서 홀짝 홀짝 드시는 거였다. 그래도 나는 배 안에서는 술 안먹는다고 참았다. 선원들 말로는 이렇게 파도가 크게 칠 때 소주 한두잔은 평상시 소주 한병 마시는 것과 같다고 하던데 이 두 노인네는 잘도 드셨다. 제주도 졸업여행 갈 때 타본 여객선이후 처음 이렇게 큰 배를 타니까 묘한 흥분감과 감정의 변화를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여전히 바람은 세게 불고 19시간의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그래서 이리저리 배 안을 구석구석 돌아보았다. 점심 먹은 지 얼마 안되었다 싶었는데 벌써 저녁 시간을 알리는 방송이 나왔다. 아이들은 이리저리 뛰어 다니고 열심히 사먹고...하여튼 시장같았다. 부모 따라 온 애들도 똑같았다. 전주에서 초중학생들이 약 80명 정도가 같이 가는데 마찬가지였다. 기본 예절의 중요성이란 말이 실감나는 아이들이었다. 우리 팀들은 42명이었고 다른 여행사를 통해 온 사람들도 그 정도는 되었다. 벌써부터 술이 거나하게 취한 분들도 보였다. 해방감이 좋았겠지 모두들. 여객선이라는 특수한 공간과 바다라는 낭만이 만나 한층 더 감정을 고조시키기에 충분했다.

 

저녁은 설렁탕이었다. 국수도 들어 있고, 그런데 조금 느끼했지만 내일을 위해서 열심히 먹었다. 저녁을 먹고 바람을 조금 쐬고 들어왔는데 배가 갈수록 요동을 치는 것이었다. 좌우로 흔들리고 바이킹을 타는 것처럼 위 아래로 움직임을 느꼈지만 그런대로 참을 수 있었다. 최후의 방법으로 일찍 자기로 했다. 약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뒤척뒤척 하다가 잠이 들었지만 얼마나 자다깨다 했는지 모른다. 참 감정의 고저를 실감나게 느꼈던 첫날이었다.

 

2002년 8월 6일(화) (둘째날)

 

선잠을 자고 나서 깨어보니 배가 훨씬 안정감이 있었다. 세수와 머리를 감고 나서 뱃전에 나가 경치를 감상했다. 모두들 일찍 일어나 배위에서 아침 산책을 하고 있었다. 간 밤의 울렁거림이 싹 가라앉고 상쾌함이 깊이 들어왔다. 육지가 보이고 고기잡이 배들도 떠 있었다. 중국 배들의 독특한 모습을 실제로 보니 저렇게 다 부서져 가는 배로 바다에 나오다니 안전 불감증인가? 아님 나의 기우인가? 하여튼 불가사리적이며 불가사의한 일이다. 아침은 된장콩나물국이었다. 지난 밤의 요동치던 속을 달래주는 훌륭한 국물이었다. 이것을 보더라도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가 또한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청도항을 향해 배는 천천히 들어가고 있었다. 항구는 제법 컸다. 어선들도 보였는데 저기 있는 배들이 우리의 영해까지 침범해 도끼질 칼질을 하며 싹쓸이를 하던 그 해적배들도 있으리라 생각하니 고얀놈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놈들이 예를 아는 민족이란 말인가? 공자의 사상이 살아있을까????

 

우리가 열강의 침략을 받고있을 때 이 산동반도에서 수 많은 중국인들이 먹을 것을 찾아 우리나라로 오질 않았던가. 우리나라 화교의 대부분이 산동성 출신이라는데 왜 그랬을까? 몹시 궁금하다 이 산동반도의 자연 환경이 어떤가? 기대가 된다.

 

하선하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선실에서는 벌써 짐을 둘러 매고 내릴 준비를 하느라고 로비가 법석이었다. 뭐가 그리도 급한지???? 도착하고도 한참있다가 내리기 시작하는데 터미널은 보이지 않았다. 버스가 와서 싣고 갔다. 터미널은 국제 터미널같지가 않았다. 하선할 때 승무원들이 전부 나와서 인사를 하는데 나도 내리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같이 했다. 어제 물어보니 승무원들이 중국인과 한국인이 반반 근무한다고 했다. 일주일에 한번 일요일날만 쉰다고 했다. 그러니까 거의 1년 내내 배 안에서 근무한다고 볼 수 있다. 식사 시간 때는 식당에서 보통 때는 안전과 자신의 맡은 일을 아주 성실히 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남승무원들은 해양대학을 나온 사람들로 고급 인력에 속할텐데 배 안에서 막일 비슷한 일을 하는 것을 보니 인내의 열매가 얼마나 달겠는가를 느낄 수 있었다. 10년 후 자신의 모습 바라보면서 묵묵히 친절하게 일하는 그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중국인은 매우 쌀쌀맞다는 것이다. 그들의 속마음을 잘 모르겠지만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터미널까지 하선객들을 싣고 간 버스는 옛날에 우리가 탔던 낡은 버스같은거였다. 한 줄에 3명씩 앉게 되었다. 세관 검사대를 통과하는데 검역서를 작성하지 않아서 나가는데 제지를 받아, 그 곳에서 작성하게 되었는데 이 사람들의 태도 아주 불쾌하고 무례했다. 아니 이놈들이 중국에 돈쓰러 오는 관광객에게 귀찮은 존재 취급을 하다니 참으로 괴씸했다.

 

세관을 통과하니 산적같은 가이드가 우리를 맞았다. 전형적인 중국인의 모습인데 조선족이란다. 자신은 중국인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였는데 어쩐지 마음 한 구석에서는 묘한 감정이 솟았다. 거지들도 보이고 거리에는 차들이 자유롭게 마음대로 다녔다. 청도 시내를 관광하는데 처음 지나간 곳이 잔교였다. 인공적으로 쌓아놓은 방파제였다. 별것도 아닌 것을 다 관광자원으로 삼는다고 생각했다.

 

다음으로 소어산공원을 관람했다. 청도 시내가 다 보이는 공원이었다. 둘레의 집들은 마치 유럽의 어느 도시처럼 아름다운 집들이 많았다. 부자들이 많이 사는 동네같았다. 여유있다면 이 곳에 와서 사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이 들정도였다. 공원 입구에서 모자 천원 천원하면서 장사꾼들이 호객을 하는 것이었다. 그 장사꾼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니 이 놈들이 살놈인가 안살 놈인가 따져보는 것 같았다. 옛날의 우리 관광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또한 인천의 자유공원 주변같은 느낌이 들었다. 조그만 어촌이 열강의 침략으로 650만이나 되는 대도시가 되었다. 그러다보니 길이 좁고 꼬불꼬불하며 일방통행길이 많은데 그것을 지키는 것인지 안지키는 것인지 하긴 지맘대로니...

 

내려와서 5.4광장을 지나갔다. 청도 시청 앞 광장인데 그 곳에다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5.4운동을 자신들의 힘으로 주체적으로 일어난 것처럼 매우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사회주의 국가이니 땅은 전부 국가 소유니 뭐든 못할까? 별것도 아닌데 중국인들이 그렇게 자랑을 하니 들어줘야지 뭐. 하지만 이곳은 청춘남녀들의 데이트 장소로 적격이었다.

 

그 다음으로 구 독일 총독관저를 관람했다. 건물은 크지가 않았고 묵직한 느낌이 드는 고풍스런 서양식 집이었다. 독일이 물러나고 일본이 차지했고 또 중국의 공산혁명으로 계급교체가 일어나 그 주동자들이 휴가도 보내곤 했던 좋은 위치에 있던 건물이었다. 그 옛날에 위엄을 부릴만 했을법함을 느꼈다.바다가 내려다 보이고 그 주변의 집들은 다들 고급 주택가였다. 또한 그 옆에는 옛 차가 하나 있었는데 그 곳에서 사진을 찍으려면 돈을 내야한다고 씌여있었는데 안내인이 나오기 전에 찍어서 돈은 안냈다. 가이드는 신참인지 아직 많이 서툴렀다. 일의 우선순위를 모르는 것이었다.

 

점심을 먹으러 가는 도중에 관광쇼핑을 하러 갔다. 청도시내 음식점 골목에 있었는데 너무나 비쌌다. 우리 물가와 같았다. 못믿을 것이 중국놈들이라 그냥 차 한잔 마시고 말았다. 점심은 한국인들이 많이 오는 관광식당이었나 보다. 같은 배를 탔던 사람들이 전부다 보였다. 기름으로 들들 볶은 중국음식을 점심으로 먹었다. 이곳 기름은 땅콩기름을 쓴다나? 청도 맥주와 같이 마셨다. 화장실은 깨끗했다. 나오는 길에 청도 흑맥주를 10원(1500원)에 한 병 샀다. 음식점이라 무척 비쌌다. 아무리 비싸도 5원인데...

 

점심을 먹고 태안으로 이동했다. 가이드 말로는 장장 6시간 반을 가야한다고 겁을 주었다. 안내 맨트가 웃기는 것은 코메디의 연변총각과 같은 풍이 쎈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차를 6시간 정도 타야 그나마 탄다는 축에 든다는 것이다. 고속도로를 지나면서 보이는 풍경들은 붉은 벽돌집이 즐비하고 차들이 별로 안다닌다는 것이었다. 청도 - 제남까지의 고속도로였는데 6차선으로 매우 한가했다. 화물차들의 적재함에는 엄청나게 많이 싣고 또 옆으로 삐져나와 백밀러가 안보일정도였다. 그러니 앞지르기를 하거나 옆을 지날 때는 꼭 경적을 울리면서 갔다. 그리고 꼭 차선을 2개 걸치면서 가는 것이었다. 중간에 두 번을 휴게소에서 쉬는데 첫 번 휴게소에서는 화장실이 너무나 냄새가 나고 물도 안나왔다. 휴게소라고는 하지만 꼭 간이 정류장같은 기분이었다. 먹을 것들을 길가에 진열장을 놓고서 파는데 사고싶은 마음이 하나도 안들었다. 어쩜 북한의 풍경과 똑같은지... 운전수는 차를 고치느라 점심을 안먹었다고 하면서 찜빵 몇 개를 사서 먹었다. 산동지방에는 밀을 주로 재배해서 사람들이 찜빵을 주로 먹는다고 했다. 맥주를 사려고 했더니 4원달라고 했다. 내가 알기로는 3원정도면 되는데 그렇게 하자고 했더니 안파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이드한테 물어 보았더니 이곳이 원래 비싸다고 했다. 중국인들의 음흉한 속마음을 알 수 있었다.

 

고속도로 양 옆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들판에는 옥수수가 심겨져 있었다. 우리와 위도가 비슷한데도 벼농사보다는 밀과 옥수수를 주로 농사짓는다고 했다. 그 옥수수는 사료용으로 재배한다고 하는데 북한백성들은 이 곳의 짐승만도 못한가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산동성 성도인 제남지역으로 들어가니 물이 흔해서 벼농사를 짓는 것이었다. 그 물은 황하강에서 끌어 쓴다나. 말로만 듣던 황하는 정말로 흙탕물이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관광자원이 된다나.... 가면서 도시 도시 이름을 설명하는데 왠놈의 사람들이 그리도 많이 사는지 툭하면 몇백만 몇백만이라니....

 

그 유명한 태산이 있는 태안에 들어섰다.

오면서 보이는 야산에는 나무 한그루 없는 민둥산이었다. 이곳 유전에는 중국 산유량의 30%를 차지한다나??? 콘크리트를 沙泥(사니)라고 한다. 석회석을 캐느라 산을 까뭉게 민둥산이란다. 앞으로도 얼마 동안 캘려는지 모른다나??? 태안으로 가는 길 옆으로는 마치 그랜드캐년 계곡같은 웅장하면서도 멋있는 광경들이 펼쳐졌다. 물론 민둥산이었다. 심겨져 있는 나무들은 미루나무인데 중국인들은 그 나무를 백양나무라고 불렀다. 우리의 옛시조에 나오는 나무이름이다. 들판이고 산이고 동네고 거의다 미루나무를 심어 놓았다. 목재가 무척 비싸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집들의 창들이 작은가? 집지을때 석가래도 전부 콘크리트 봉을 쓰는 모습이 보였다. 또한 기차들은 화물칸을 40-50량씩 달고 다녔다. 산지가 없고 평지이니까 기관차 한대로도 충분히 다닐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지형같으면 엄두도 못낼 일이었다.

 

저녁 식사하는 곳은 거대한 식당이었다. 역시 전주에서 온 아이들과 또 만났다. 맥주와 함께 맛있게 먹는데 물론 기름으로 들들 볶았지만 종업원 아가씨들이 술을 따라주는데 한 손으로 잔을 탁자에 놓고 따르는 것이었다. 나올 때는 어떤 한 아가씨가 우리말로 안녕히 가시오! 하는 것이었다. 숙소는 태산대주점이었다. 영어가 통하지 않는 곳이었다. 발맛사지(2만원)를 하러 가자는데 피곤해서 안가기로 했다. 우선 이발을 꼭 하고 싶어서 이발소를 찾았으나 못찾고 길을 걷다가 우리식 피씨방을 보았다. 젊은이들이 열심히 오락을 하고 있었다. 또 그 앞에서 애들이 몇이 있었는데 그 애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말은 통하지 않지만, 그놈들 말썽장이는 아닌 것 같은데 알 수 있나. 공부 열심히 하고 집에 일찍 들어가라고 말하고 헤어졌다. 그놈들이 나하고 이야기 한 것 가지고 지들끼리 낄낄거리며 웃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외국 관광객이 우리 한국인 밖엔 없었다. 이리저리 거닐다가 호텔근처에 있는 커다란 수퍼에 들어갔다. 그 곳에서 과자와 음료수를 샀다. 아무 말 않고 그냥 바라만 보다가 계산 결과를 보고 돈을 냈다. 역시 중국 아가씨들 되게 쌀쌀맞았다. 억양이 그래서 그런가?? 과자는 우리의 것들과 비슷했다. 우리의 복제품이라 생각하면 좋으리라. 특이한 것은 과일포가 많고 과자 진열대에 놓여 있는점이다. 북경이나 청도나 계림이나 중국 어디든 다 똑같다. 아니 그 넓은 땅에서 똑같다니??? 하긴 우리나라도 전국이 똑같지 않은가...숙소에 돌아와 잠을 청했다. 피곤이 몰려왔다. 어이구 여행도 힘이 있어야 하지. 내가 술에 골았나???? 노신사 두분은 역시 예상대로 중학교 교장이고 또 한분은 은퇴하신 분이었다. 내가 그 분들을 알아보듯이 그분들도 내가 선생임을 알아봤다나??

 

아니 오늘도 오며 가며 길가의 간판을 주의깊게 봤는데 이 산동반도에 산동반점이라는 간판이 하나도 안보이는 것이었다. "산동반점!" 내일은 꼭 찾아보리라 산동반점을.

 

2002년 8월 7일 (수) (셋째날)

 

아침에 일어나 하늘을 보니 무척 맑았다. 어제 밤에 보지 못했던 뒷골목을 둘러 보기로 했

다. 큰 식당 뒤편이었는데 이건 엉망이었다. 냄새에 쓰레기에 어두운 공장같은 곳에서 음식

을 만들다니... 출근하는 아가씨들 손에는 찜빵이 비닐봉지에 몇 개씩 들어있었다. 내킨 김

에 어제 밤보다 더 먼곳으로 나가보았다. 조금 더 가니 공원이 있었고 노인들이 태극권을 하고 있었다. 그 옆으로 집에서 가지고 나온 복숭아며 포도 등을 파는 상인들이 있었다. 우리식으로 생각하면 상품가치가 없는 물건들을 가지고 나와 파는 것이다. 어설픈 농작물을 가지고 나와 팔고 있었다. 어떤 아줌마가 복숭아 사는 것을 보면서 아무말도 안고 지켜보았다. 값이 대충 얼마인가를 눈치 채고 나도 복숭아를 샀다. 2.8킬로를 6원(약 900원)어치를 샀는데 한 20개정도였다. 그 복숭아 장수는 양심적으로 팔았다. 나중에 돈을 내야하는데 내가 종이에 써서 물으니 정확하게 값을 적어 주는 것이었다. 그 아줌마도 한국사람 처음 상대했을라나?? 나중엔 웃으면서 인사를 나누었다. 사실 어제 청도 소어산 공원에서 1000원에 8개정도 사는 것을 보았는데 내가 산 것은 제 값을 주고 산 것이었다. 농산물이 싼 중국이라지만 정말 쌌다. 식량이 공산주의니까. 오는 길에 보니 콩국을 파는 사람 사는 사람등 중국인의 생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침은 뷔페식이라 덜어 먹는데 별것이 아니었다 먹을게 있어야지(내 기준에서)... 콩국을 마시고 계란을 까먹고 하여튼 고루 고루 먹었다. 중국인들은 아침에 계란을 먹는단다. 잘 먹어야 견디지, 현지에 와서는 현지의 음식을 잘 먹어야 좋은 여행이된다는 생각에 열심히 알맞게 먹었다. 게다가 배에서 사온 북경 동인당표 십전대보주를 남인천여중 이상철교장과 같이 나머지를 다 해치웠다. 아침이지만 기분좋게 얼큰했다.

 

태산을 오르는데는 조그만 소형버스로 갈아타고 올랐다. 꼬불꼬불 길을 따라 오르다가 집표처에서 표사는 동안 할머니 들이 나와서 잡다한 물건들을 팔고 있었는데 쓰레기같은 것이었다. 값이 다 다르고 돈을 더 받으려 하고, 하긴 관광지니 그렇지 하면서도 노인들이 나와서 파는 것을 보니 쫌 그랬다. 하지만 노인들이 그렇게 일이라도 하니 다행인 면도 있는 것이다. 한 칸에 6명씩 타는 케이블카(삭도)를 타고 올랐다. 양옆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우리의 산과 같았다. 소나무며 매미소리며 잠자리 등등이 똑같았다. 마치 우리의 산을 오르는 듯 했다.

 

이 태산이라는 것이 평지에 우뚝 솟아난 산으로 악산이었다. 돌 많고 물 적은 그런 산. 관악산이 몇십배 훨씬 아름다운데 왜 우리 조상들은 그런 산을 노래했을까? 모화사상?? 이곳 노나라에서는 제일 높은 산이니까 그러려니 하겠지만 왜 우리까지 덩달아 그럤을까? 산 위에 오르니 음식점들이 길 양옆으로 즐비하고 사진사들이 참 많았다. 天街(천가)=하늘길을 따라 옥황정에 올랐다. 옛시조에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오를리 없지만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라고 선조들이 읊었지만 우리의 산과는 비교가 안되었다. 서울 근교 수락산정도의 산수가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단지 산동반도에서 볼 수 있는 명산이라서 그렇게 많은 의미를 두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높이는 1545미터로 모처럼 하늘이 맑아서 상쾌했다. 산 위는 바람이 살랑 불어서 아주 시원 상쾌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물건을 팔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중국인민해방군들이 입는 방한복 같은 것을 입고 있었고 더러는 햇볕에 널어 말리는 풍경이 있었다. 중국놈들도 우리의 명산대천 바위에 글을 새겨 놓듯이 군데군데 많이도 새겨 놓았다.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경치 감상을 했지만 역시 우리의 산과는 비교가 안되었다. 우리의 산이 훨씬 아름답고 웅장했다. 많은 인원을 실어 나르기 위해 여러 방향에서 타고 올라 올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하여튼 발상이 중국인들 다웠다.

 

삭도를 타러 내려오는 길에 전주에서 온 아이들이 장난을 하다가 엉터리 돌조각을 밀쳐 깨졌다. 엉터리 인공 돌을 깨고서 값을 물었다. 바가지에 바가지를 썼을 것이다. 그 돈을 받는 중국놈의 얼굴을 보니 무척 행복한 얼굴이었다. 그것을 보면서 아이들의 교육문제를 생각않을 수 없었다. 하산 후 점심을 먹었다. 역시 기름에 들들 볶은 음식. 맥주와 함께 먹었다. 별것도 아니었다. 내가 먹은 것이 중국 음식의 전부는 아닌 일부이지만 한국의 중국음식이 질적인 면에서는 훨씬 훌륭하다.

 

다음으로 공자의 고향인 곡부로 향했다. 날이 너무 화창해서 좋았지만 온 몸을 땀으로 목욕했다. 곡부로 들어가는 길은 완전 시골길이었다. 공림을 방문하여 공자의 묘와 그 후손 묘를 관람했는데 무덤 위에는 풀과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공림 입구 양 옆으로 기념품 가게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도장 파는 사람들은 우리돈으로 천원 정도로 팠다. 관광지라서 물가가 비쌌다. 곡부인구가 11만 정도 되는데 약 8만 정도가 공씨라고 한다. 그 공씨들 중에 공림으로 자동차를 타고 다닐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단다. 우리 같으면 어디 그런 세계적인 문화재내에서 자동차를 타고 다닐 수가 있을까? 참으로 기상천외한 일들이 버젓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孔廟(공묘)를 방문했다. 위대한 성인이라서 중국 역대황제들도 공자를 섬기

며 많은 존경심을 비석으로 표현했다. 대성전은 마치 황궁처럼 호화로운 기둥은 용이 용트림하는 모습이 실감나게 조각되어있었다. 대성전 그 자체도 궁전처럼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나오는 길에는 걸인들이 여러명 나와서 구걸을 했는데 다 자기 구역이 있었나 보다. 처음보는 노걸인에게 2각을 주었다. 나오다 보니 그런 류의 사람들이 많았다.

 

공자 공자 하지만 사실 살펴보니 공자 때문에 먹고 살면서도 사실은 공자의 사상과 실천윤리와는 전혀 무관하게 사는 사람들 같았다. 공자는 단지 역사 속의 인물, 자기들의 현실 생활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하긴 중국의 문화 대혁명과 사회주의 사상으로 모든 정신적 유산이 파괴 되었으니 전통이 남아있을 리가 없지. 그래서 우리나라에 와서 종묘제례악이나 기타 유교에 관한 것들을 배워가지. 껍데기만 남아있는 공림! 공묘!

 

규모는 작지만 그래도 공자의 사상이 꽃피운 것은 우리나라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또한

역사의식과 세계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이나 단체가 공자의 사상을 꽃피운 우리나라를 관광자원화하면 안될까? 실제로 체험하고 느낄 수 있게 얼마든지 만들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묘 주변엔 말과 자전거 인력거들이 호객을 하고 우리의 옛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호텔로 들어가 방을 배정받았는데 곡부의 건물들은 모두 23.5미터 이내로 지어야한다는 것이었다. 대성전의 높이보다 높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가방을 놓고서 바로 시장으로 나갔다. 이발소를 찾으러 다녔지만 없었다. 시장을 구석구석 돌아다니고 물을 2병사서(6원) 다시 돌아왔다. 저녁을 먹는데 처음으로 서양인들을 보았다. 말은 안해봤지만 신기한 표정이 역력했다. 호텔은 궐리빈관이었다. 검은 색을 주색으로 내외부 장식을 한 호텔이었다.

 

가이드 말로는 곡부에 와서 공자쑈를 안보면 후회한다고 했다. 쑈를 보러가기 전에 호텔 내에 있는 이발소에 가서 컷트만 20원(3000원)주고 했다. 짧은 시간이었는데 그냥 깎았다. 머리털을 적당히 털고 공자쑈를 보러 갔다. 노천극장이었는데 규모가 대단했다. 출연진들이 약 500명이 나와서 仁者愛人이란 주제로 4장에 걸쳐 무용을 했는데 중화사상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내용을 보면 웃음이 나오는 장면들도 있지만 그 규모는 대단했다. 과연 중국인들 다운 발상이었다. 130원씩 주고 봤다. 다 끝나고 출연진 모두가 나와서 인사할 때 사진 찍는 시간이있었다.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무희들과 같이 사진을 찍었다. 태국의 알카자쑈는 무희들과 사진찍는데 돈을 받았지만 여기는 아직 그러지는 않았다. 하긴 이날 관광객은 우리 한국인 120명 정도가 전부였으니까. 몇장 찍다가 아쉬워서 더 찍으려니 음악이 꺼지고 조명도 꺼지니 무희들이 쌀쌀맞은 표정으로 뒤도 안돌아보고 찬바람 내며 들어가는 것이었다. 참으로 웃음만 나왔다. 그렇지만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은 갈 때와는 달리 금방 왔다. 가이드와 운전수가 머리를 쓴 것이었다.

호텔에 돌아와 머리를 얼른 감고 이상철 교장팀과 함께 야시장에 나갔다. 맥주와 꼬치 안주

를 먹는데 꼬치를 끼우는 막대는 바로 자전거 살이었다. 녹슬은 자전거 살에 고기를 끼워서

굽는 것이었다. 또한 기가막힌 것은 소녀들이 기타를 들고 다니면서 신청곡을 받아 노래를 하고 한 곡당 3원씩 받는 것이었는데 기타는 폼으로 들고 다니는 것이었다. 키타의 음은 하나도 맞지 않고 그저 긁어대는 것이었다. 우리 탁자에서는 두곡에 5원을 주고 들었다 참으로 어떻게 표현해야할지....부모가 없는 아이들인지, 아니면 누가 시켜서 한 것인지... 우리 탁자에 와서 노래를 불렀는데도 다른 애들이 서너번 왔고 그 아이가 또 왔다. 와서는 또 천연덕스럽게 요구를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중국인들인가??? 술마시고 자전거살 꼬치를 먹다보니 시간이 많이 지나 더 늦기 전에 야시장을 둘러 물건을 사기로 했는데 음식점만 말고는 다 닫았는데 딱 한 집만 남아서 그 곳에 들러 양말을 사려했다. 그런데 처음 흥정하고 다른것이다. 처음에 2원이라고 했다가 막상 사려니까 그 배로 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안산다고 하고 돌아오려는데 그들이 부르는 것이다. 10원에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10원주고 5켤레를 샀다. 시장에서 흥정을 하며 물건을 사고 파는 것이 즐겁지만 그것도 공자의 고향에서 공자로 벌어먹고 사는 그 후손들이 자신들의 선조의 정신과는 전혀 다른 소인배들의 행동을 버젓이 하니 참...헛김이 빠졌다. 다시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니 술잔이 몇순배 더 돌았다. 그래도 아쉬워 호떡을 구워 파는 할머니한테 가서 호떡 값을 물어보니 1원(150원)이란다. 그래서 가이드한테 물어보니 값을 배로 부른 것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중국 호떡 맛을 보고싶었지만 내가 5각짜리를 1원에 주면 그것이 한국인에게 공정가격이 되기에 사지 않았다. 그런데 그 할머니의 표정이란게 아주 표독스럽게 변하는 것이었다. 참말로 웃기는 곳이었다. 하긴 관광지니까 그러려니 하지만 그래도 곱게 봐 줄수가 없었다. 일행과 더 마시기 위해 이곳 포도주를 사려했는데 35원이라는 비싼 값을 부르는 것이어서 흥정을 했지만 실패하여 사지않고 왔다. 인도는 다 울퉁불퉁하여 오히려 차도로 다니는게 안전하여 술걸음을 조심하며 호텔로 돌아왔다. 오늘은 아침부터 밤까지 술에 묻혀 지냈다. 피곤이 밀려와 호텔에 들어와 잠을 청했다.

 

오늘도 역시 산동반점이라는 간판을 찾지 못했다. 내일도 다시 찾아봐야지.

 

2002년 8월 8일(목) (넷째날)

 

어제의 과음으로 힘들게 일어났다. 어제 저녁에 다닌 길 말고 다른 길을 걸어보았다. 잿빛 도시 무질서 도시의 아침을 걸어다니니 관광객인지 알고 택시와 자전거인력거꾼들이 호객을 했다. 나도 중국사람들처럼 길을 아무데나 걸어다니면서 이곳 저곳을 둘러 보았다. 다른 곳으로 한참 갔더니 중국인들이 물건을 사고 파는 간이 장터가 있었다. 어떤 새까만 아저씨가 복숭아를 가지고 나와서 파는데 7원어치를 샀다. 어제보다는 훨씬 많은 양이었다. 호텔로 돌아와 아침을 먹는데 음식이 부실했다. 중국사람들마냥 계란을 먹고 간단한 음료로 아침을 해결했다. 사람은 많은데 음식은 조금 진열해 놓으니 급한 우리 한국사람들 어디 먹겠나?

 

7시 40분 쯤에서 제남시에 있는 황하로 향했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좁았다. 우기가 되면 넘쳐난다니까 지금과는 다르겠지만. 옛 조상들은 황하의 어디를 다녔을까? 우리의 한강 아니 다른 강이 훨씬 아름다웠다. 흙탕물도 하나의 관광자원으로 만드니...거기다가 이곳에선 공기부양선이 있어 수륙양용으로 다니는 것을 타 보았다. 별것도 아니었다. 시끄럽기만하지 원??? 중간에 내려 사진도 찍고 다시 돌아왔다. 삼국지에 나오는 약산이 보였는데 조그만 야산이었다. 그 위에 조그만 정자 하나 지어 놓고... 하여튼 중국이란???? 별것도 아닌 공기부양선에 중국돈 200원(우리돈 3만원)을 냈다. 그래도 두 번 오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으로 탔다.

 

다음으로 제남시에 있는 산동성 박물관을 갔다. 가는 길 양 옆으로는 끝없이 펼쳐진 들판이었다. 산동성의 성도인 제남시도 인구가 어찌그리 많은지, 또 이곳 프로축구단 감독이 우리나라 이장수 감독이라나, 박물관 건물은 큰데 내용물들은 별거 아니었다. 점심시간이라고 문을 안열어 준다며 쇼핑을 해야지만 열어준다나???? 기가 막혀서! 마치 창고문을 열고 닫듯이 쌀쌀맞은 표정으로 대하는데 아니 박물관에 와주어서 고맙다고 해야 될 판에 귀찮은 듯한 표정을 짓다니... 하여튼 불가사의한 나라이다. 건물은 큰데 그 내용물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박물관하고는 달랐다. 화장실도 복도도 모두가 이상했다. 박물관으로 지었는지 물건을 팔기 위해 지었는지 구분이 안될 지경이었다.

 

점심은 시내에서 약간 벗어난 새로 지은 대주점인데 내부 장식은 좋았지만 음식은 별것이 아니었다. 종업원들이 시원찮아서 음식도 빼먹고 늦게 내오고... 하여튼 최악의 점심이었다.

그 후로 치박에 있는 강태공사당으로 향했다. 제나라의 시조인 강태공. 우리가 생각하는 강태공은 신화적인 이야기라고 했다. 사당에 들어섰더니 조그만 모기들에게 5-6방정도 물렸는데 금방 불어났다. 그 강태공의 아들 중에 구씨가 된 사람이 있었는데 우리나라 구씨들이 기념비를 구조전에 세운 것이 보였다. 그 옆의 화장실은 1인당 3각씩 받았는데 이건 말이 아니었다.

 

그 다음은 순마갱을 찾아갔는데 아주 시골이었다. 그런데 순마갱이 자기 집인지 유적지인지 구별이 안되었다. 이곳 또한 사진 찍는데 돈을 받는 것이었다. 하긴 사진 찍을 가치도 없었지만. 한 사람을 위해 그렇게 많은 말들이 죽임을 당해 묻혔다는게 과연 그럴 가치가 있었단 말인가? 순마갱 앞의 그늘 아래에선 동네 사람들이 장기를 두는데 완전히 왕장기였다. 우리가 장기대국을 구경하니 오히려 우리가 구경거리가 되었다. 도중에 길 수리 공사가 있는데 차량통행이 엉망이었다.

다음으로는 유방으로 가는 먼 길이었다. 고속국도인지 그냥 국도인지 일반 차들도 다니고 자전거도 다니고 엉망이었다. 길 양옆으로 펼쳐지는 광경은 꽃들도 키우고 모든 땅들을 요모조모로 다 이용하고 있었다. 아니 이렇게 넓은 땅을 알뜰하게 이용하면서 왜 못살았을까? 정치 탓이었을까? 우리의 농촌과 다를바가 없었다. 일반 국도를 달려 유방에 도착햇는데 이상한 것은 국도에 자전거 사람 다 돌아 다니는데 통행료를 받는 것이다. 고속도로인가? 아닌데... 유방이란 도시도 엄청 큰 도시다. 그런데 도시 모습이 전국적으로 통일된 모습이다. 마침내 시내 한 주점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맥주와 중국소주로 거나하게 마셨다. 술기운에 건배를 외치고 잔을 머리 위에 터는 등 행동을 하고 띵호 중꿔 꾸냥을 외쳤더니만 종업원들이 다 웃었다.

 

호텔은 더 멀리 있었다. 동방대주점이었는데 공사중이라서 미로를 찾아해매다 들어가 정리한 다음 곧바로 야시장에 나갔다. 학생 남매와 꼬마 아이들과 같이 가는데 중국사람들처럼 길을 함부러 건너고 내 맘대로 했다. 야시장에서 볼펜과 붓을 5원에 사고 계산기도 7원에 사고 국수 2원 생맥주 1잔 1원에 마시고 맥주 2병 4원 과자와 음료수를 7원 5각을 주고 샀다. 오다가 복숭아는 흥정실패했다. 물건을 사는 과정에 중국인과 필담을 나누었다. 사람사는 일은 어디나 같다. 복 많이 받으라고 글로 써 주었더니 무척 즐거워했다. 하긴 중국인들은 복을 엄청나게 바라니까. 노천 음식점에선 손자용돈 1각을 줬다. 아주 재미있고 흥미있던 시간이었다.

내일은 5시 기상 5시 40분 식사 6시 30분 출발이란다. 아 무척 피곤한데....

 

아니 정말 산동반점은 없단 말인가?

 

2002년 8월9일(금) (다섯째날)

 

아침에 일어나 세면을 하고 로비로 나갔다. 힘이 들었다. 마지막 날이라서 그런지 모두들 늦었다. 가이드는 어제의 과음으로 비몽사몽같은 몰골을 하고 졸고있었다. 호텔 종업원들은 한결같이 키도 크고 멋있으며 예뻤다. 식당에선 음식이 작은 접시로 나왔는데 역시 부실했다. 식당 종업원과 필담을 나누었는데 수박을 달라고 하니 못알아 듯는 것이다. 대신에 水果라고 적어주며 곧 나온다고 했다. 호박 맛같은 수과. 접대원 동무와 필담으로 복 많이 받으라고 써 주었더니 무척 즐거워 했다. 나오면서 사진도 찍었다. 호텔이 훌륭했다. 모두들 피곤한 몸으로 영성시 석도에 있는 적산법화원을 향했다. 가는 길이 서울-부산 거리 정도라서 가면서 쉬엄쉬엄 갔는데 주유소에서 쉬었다. 그 곳 화장실은 정말 대단했다. 칸막이가 없는 곳이었다. 용변을 보려면 모두들 보는 앞에서 엉덩이를 까고 봐야 하는 것이다. 하긴 중국사람들은 생활이라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냄새 죽여주고. 얼씨구! 아이들과 여자들은 화장실에 들어 갔다가 되돌아 나오길 여러차례, 하지만 방법이 없으니 모두들 용변을 봐야지 어쩌겠어. 정말 영화 한 장면이었다. 하긴 우리도 예전에 다 그랬지만, 너무 인간적인? 화장실(측소, 세수간)을 원없이 봤다. 어제 밤에 사둔 맥주 두병을 쉬는 중간에 남자들과 나누어 마셨다. 다들 목마른 상황이었는데 효자 노릇을 했다.

 

또 무작정 달렸다. 이곳 역시 땅을 아주 요모조모 알뜰하게 이용하고 있었다. 바닷가로 갈수록 야산도 보이고 높은 산도 보였지만 전부다 민둥산이다. 중국 황사가 실감날 정도다. 이렇게 전부다 민둥산이니 봄바람이 불면 우리 나라로 날아 올 수 밖에...다른 휴게소에 들르니 주변 복숭아 장수들이 와서 파는데 무척 비싸면서도 전혀 깎아주지 않았다. 우리의 상인들과는 다르다. 무척 쌀쌀맞으며 악착같다. 여기서 음료수와 과자를 샀다. 25원어치였다. 음료수는 우리 어린시절의 음료수 맛과 같다.

 

영성시 석도를 들어섰다 바다가 시원하고 풍경이 우리와 비슷했다. 적산 법화원 가는 길은

시골 골목길 같았다. 아니 시골길이다. 꼬불꼬불 비포장. 아니 중국놈들 한국인들이 여기에

와서 돈을 얼마나 뿌리고 가는데 아직도 이 모양이여? 하긴 중국인들의 꿍꿍이 속을 누가 알리? 지금 입구까지 들어가는 공사를 하고 있었다. 언제 완성하려는지는 모르지만 일꾼들이 모두 나무 그늘아래서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주변 집들은 화훼농업 중 분재를 하고 있었다. 법화원 앞의 나무 그늘아래서 젊은이들이 찜빵으로 점심을 먹는 것 같았는데 맥주를 한병씩 들고 병나발을 불면서 빵을 먹고 있었다. 모두들 윗저고리는 반쯤 벗어놓고서. 법화원은 장보고 대사가 통치하던 곳에 세운 절로서 부처님 상호가 우리 부처님의 상호와 비슷했다. 신라시대 노예로 팔려온 사람들을 신라로 돌려 보내고 마침내 해상왕이 되었지만 신라의 권력싸움에 패한 장보고 장군이 통치했던 곳. 그 당시는 말이 신라나 중국이나 다 비슷했으리라. 중국의 사극을 보면 신라인들이 조공을 바치는 모습이 나오는데 과연 그랬는가? 하여튼 음흉한 중국인들은 자기네 중심의 사고가 철저하다. 이 곳 역시 관광지화 되어 입장료를 받았다. 경내 관람을 마치고 옆에 있는 목조각을 보고 수석도 둘러 보았다.

 

그리고는 점심을 먹으로 갔다. 진작 이동하느라고 시간 많이 잡아먹었지 관광지에서는 시간이 항시 부족했다. 하긴 워낙 장거리를 다녀야하니까 이해가 갔다. 식당은 풍치가 뛰어난 바닷가에 있는 주점이었다. 기회가 되면 이 곳에 묵으면서 휴식을 취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서 사진을 찍으러 다니다 보니 환경하고는 전혀 무관한 사람들이었다. 호텔에서 나오는 하수가 그대로 바다로 배출되고 있었다. 하긴 우리는 안그런가? 조금 떨어진 곳에 해수욕장이 보였는데 물놀이 하는 사람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음식은 제법 우리와 비슷했지만 여전히 기름에 들들 볶은 것이 주류. 그 중 유일한 非기름은 미역초무침이었다. 마늘을 많이 찌어넣고 식초에 무친 것이 오랫만에 입안이 상큼했다.

 

바쁘게 여객터미널로 갔다. 가는 도중 참기름과 참깨 사는 사람들에게 돈받고 바쁘다 바뻐! 많은 사람들이 한가득씩 산다. 사다가 팔면 여행비가 빠지려나? 정말 싸가지없는 인간들은 바리바리 사는 것이었지만 나는 전혀 안샀다. 터미널은 사람들로 엄청 북적거렸다. 이상하게 생긴 공안원들이 아무나 못들어가게 하는 것이었다. 완전히 호떡집에 불난것처럼 북적거렸다. 모두들 한국인인데 중국에 며칠 살다보니 하는 짓들이 중국인들과 똑같았다. 잠깐의 시간이 있어 밖으로 나가서 음료수와 과자를 샀다 그런데 살만한 물건이 별로 없었다. 중국에서의 마지막 시간이다.

 

수속을 마치고 배로 승선을 했다. 배는 훨씬 크고 안정감이 있었다. 침실도 훨씬 넓고 컸다.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이곳 저곳을 둘러 보면서 위치 파악을 다 했다. 출발 후 1

시간 후에 면세점이 열어서 십전대보주를 7병을 샀다. 6달라씩. 뉴골든 브릿지 2호(26000톤)는 6시에 출발한다고 했는데 근 7시 다 되어 출항했다. 저녁식사는 6시 경에 먹었는데 난 김치찌개를 먹고 부인은 낙지볶음을 먹었다. 모처럼만에 개운한 우리 음식을 먹으니 상쾌했다. 그러면서 여행내내 식사를 같이 했던 선생님 두 분과 함께 십전 대보주를 셋이서 다 마셨다. 아이구 얼큰! 그러고 나서 쉴려고 했는데 두분이서 노래방을 가자고 해서 선내에 있는 노래방을 갔다. 조선족 선원이 근무를 하는데 곡을 신청하면 틀어주는 방식이었다. 2만원이면 맥주 6캔에 마른안주까지 나왔다. 내가 가지고 들어간 맥주 2캔에 6캔을 더 사고 만취되어 한 분을 부축해서 침실로 돌아와 그냥 뻗어서 잤다. 자는데 이불을 홱 빼앗아 가는거였다. 나는 그냥 그대로 잤다. 세수도 안하고 이도 안 닦고 그냥 세상 모르게. 아 아쉬워라. 밤바다를 보며 밤하늘을 보며 운치있게 오려고 했는데... 에이

이번 겨울에는 속초에서 배타고 백두산이나 가야지. 그 때는 지금과는 다르게 더 멋있게 다녀야지. 혼자서.

 

아니 오늘도 정말 산동반점을 못찾았네...

정말로 산동반점이 없단 말인가?